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소리 Oct 17. 2023

오천 원 주고 산 중고 팝콘메이커 사용기

직접 만드는 재미의 가치소비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패딩을 입은 여자가 아파트단지를 내려온다. 검은색 슬리퍼에 맨발이었다. 한 손에는 거대한 박스가 담아져 있는 종이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당근 맞죠? 5천 원이라 반품 환불 어려워요. 잘 쓰세요."

가까이서 보니 청소년이었다. 물건을 팔기 전 부모님 동의는 받은 걸까 살짝 고민했지만, 5천 원짜리 거래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마을버스비 왕복 2,400원과 팝콘 메이커 중고 5,000원, 거래의 총비용은 도합 7,400원이다. 팝콘메이커는 새 거를 사도 2만 원인데, 실속 있는 중고거래였을까.


팝콘메이커는 중고마켓에 자주 등장하는 품목이다.

'미사용 정품입니다.'
'딱 한번 썼어요. 잘 안 써서 내놓아요.'

가정용 팝콘메이커의 정가가 워낙 싸다 보니, 중고거래가도 을 수 없다. 거래희망가격이 싼 만큼, 다른 물품과 달리 구구절절한 사연도 없다. 대부분 새 거이거나 많아야 3번 썼단다. 내가 구입한 팝콘메이커의 전 주인도 딱 2번 사용하고 박스에 도로 넣어놓았다고 한다.

팝콘메이커 같은 사연을 지닌 저가형 가정용 기계로는 솜사탕메이커, 와플메이커, 아이스크림메이커 등이 있다. 호기심으로 써보면 좀 재미있을 것 같지만, 호기심이 꺼지는 동시에 자리를 차지하는 짐이 될 것으로 보이는 기계들... 하지만 이번만은 너무 사고 싶었다. 옥수수만 넣으면 1분도 안 돼서 팝콘이 뿅뿅뿅 하고 나온다지 않나.

구구절절 사연이 없는 팝콘메이커의 중고거래

팝콘을 1년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하는 팝콘 무관심자가 팝콘메이커를 사게 된 건 다 친정엄마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언제적 옥수수니! 이거 못 먹겠으면 밥 하는데 넣어."

우리 집에 잠깐 반찬만 주겠다며 들른 엄마는, 반찬을 놓고 휘 우리 집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쌓아놓고 살면 안 된다며 무작정 부엌 옆 선반의 물건을 다 꺼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옥수수 100g이 든 작은 포켓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그냥 옥수수쌀이 아니고, 팝콘용 옥수수였다. 몇 달 전 정기구독하는 봉화 농산물꾸러미에서 온 팝콘옥수수는 팝콘을 해 먹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숙제 같은 거였다. 빨갛고 노란 옥수수들이 물기 없이 바짝 말라 섞여있었다. 이번에라도 처분을 하지 않으면, 친정엄마는 팝콘이 될 옥수수의 정체성을 무시하고, 강제로 밥 하는데 때려 넣을 태세였다. 미적대는 나를 보고, 친정엄마가 또 한마디 한다.

"밥에 넣기 싫으면 옥수수차 끓여 먹던지."

국산팝콘옥수수, 수확 후 망에서 바짝 건조해 수분을 없앤다.( 출처 : 다음카페 상희의 꾸러미 https://cafe.daum.net/sanghee2015)


팝콘옥수수가 잡곡밥이나 차로 소비되기 직전, 친정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팝콘옥수수 프라이팬에 튀기기'를 검색했다. '프라이팬을 예열하고, 기름을 두르고 옥수수알을 한주먹 때려 넣은 뒤, 중약불을 유지하면 펑펑펑 소리가 나면서 팝콘이 된다, 거의 다 튀겨지면 불을 끈다...' 하,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펑펑펑 팝콘이 튀겨지긴 했지만 불발탄이 너무 많았고, 중간에 불발탄이 얼마나 남았나 뚜껑을 열었다가  튀겨진 팝콘이 냄비밖으로 나오고, 다시 뚜껑을 덮고 기다리자 탄내와 함께 연기가... 냄새는 어찌나 무거운지, 온 집안이 순식간에 팝콘냄새로 가득했다. 불을 황급히 끄고는, 베란다문을 활짝 열고 프라이팬 뚜껑들어올리자 팝콘으로 변신한 옥수수 반, 불발탄 반, 팝콘이 이렇게 골치 아픈 거였나. 팝콘옥수수는 다시 창고에 처박혔다.

"얘. 너 그거 옥수수 남은 거 다 처분했니? 곡물이라고 계속 그렇게 보관하면 안 돼. 밥에라도 넣으라니까."

몇 달 후 친정엄마는 전화하다 불현듯 우리 집 팝콘옥수수의 근황을 물었다. '다 먹었어.' 얼버무렸던 그날 나는 결심했다. 팝콘메이커를 사기로.

프라이팬에 팝콘 튀기기, 약 15분 정도 소요된다


거래가 5천 원의 팝콘 메이커를 상자에서 꺼냈다. 전원 버튼 1개가 기능의 전부라 설명서를 읽을 필요도 없었다. 창고에 몇 달째 처박혀있던 팝콘옥수수를 두 숟가락 퍼다가 팝콘메이커에 쏟아붓고, 팝콘을 받을 그릇을 준비한 후 전원버튼을 눌렀다. 위위윙 모터의 소리와 함께 기계는 순식간에 가열되었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하얀 눈꽃송이 같은 팝콘이 우수수 나왔다. 그릇에 담긴 팝콘을 보니 불발탄이 5개 미만이었다. 15분이나 프라이팬 앞에서 팝콘이 잘 되나 안 되나 조마조마했던 난이도는 저리 가라였다. 팝콘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나보다 더 신난 건 6살 아이였다. 팝콘메이커가 내뿜는 팝콘폭포 앞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른다. 그날 우리는 모터가 과열돼서 성능이 떨어질 때까지 팝콘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몇 번 쓰다 말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팝콘메이커는 우리 집의 인기스타로 등극했다. 장난감이 많이 없는 우리 집에 놀러 온 동네 꼬마들을 맞이하느라, 팝콘메이커는 30분은 족히 놀아주는 육아동반자가 되었다. 옥수수를 넣고, 전원버튼을 누르고, 팝콘이 나오는 모든 과정이 축제였다. 팝콘에는 따로 시즈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내줄 것이라고는 소금 밖에 없어 종지에 소금을 건넸다. 젤리와 시중과자의 자극적인 맛에 익숙한 꼬마들도 자신이 만든 팝콘이라서인지 소금만 찍어먹어도 맛있어했다. 재밌어서 더 맛있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팝콘을 튀기는 꼬마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꼬마들을 위하여 우리는 항상 팝콘옥수수를 구비하게 되었다. 시중에 파는 대부분의 팝콘용 옥수수는 미국산인데, 유전자변형옥수수가 많다. 영화관이나 편의점에서 파는 팝콘도 모두 미국산이니, 우리가 직접 해 먹지 않고서야 유전자변형옥수수로 만든 팝콘을 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팝콘이 GMO의 대표 작물이기 때문에, 한살림, 자연드림, 두레생협, 올가홀푸드 등에서는 일찍이 국산팝콘옥수수 및 국산옥수수로 만든 팝콘을 유통해 왔다. 그런 매장이 아니더라도 온라인에서도 국산팝콘옥수수를 쉽게 구할 수 있어 해먹을 수만 있다면 국산팝콘을 먹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동네 꼬마들은 우리 집을 떠나며 직접 만든 팝콘을 봉지 한가득 싸간다. 유전자변형작물들이 시중의 식품들을 지배하는 세상에, 동네 꼬마들의 손 국산팝콘이 우리 동네로 퍼져간다. 국산옥수수가 퍼지고 또 퍼지다 보면 언젠가 시중 슈퍼에서 파는 팝콘도 국산옥수수로 생산되는 그날이 오겠지. 그 날을 기다리며 우리 집 오천 원짜리 중고 팝콘메이커는 오늘도 열일한다.   

시중에 유통되는 대부분의 팝콘옥수수 및 팝콘은 대부분 미국산으로 유전자변형옥수수 포함 가능성이 있다.


작가의 이전글 타슈켄트에서 아이스스케이트 타기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