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당근마켓에서 왜 피아노는 무료나눔딱지가 붙었을까

무료 나눔 대상이 된 애물단지, 나무피아노

by 박수소리

취미가 '피아노 치기'인 나는 사지도 않을 거면서 종종 당근마켓에 '피아노'를 쳐보곤 한다. 내가 유독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은 전자피아노가 아닌 나무피아노다. 하나에 적어도 100kg에서 200kg에 육박하는, 집안에 존재하는 코끼리 같은 피아노. 당근마켓에 나온 대부분의 나무피아노는 가정에 많이 배포되어 있는 업라이트나 콘솔 피아노다. 밋밋하고 클래식한 검정피아노부터, 묵직한 진갈색의 나무 피아노, 예술적인 조각이 수놓아져 있는 피아노까지 당근마켓에 매물로 내놓아진 피아노는 실로 다양하다.

당근마켓에 내놓아진 피아노는 대부분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에 쳤으나 지금은 1년에 1번 칠까 말까 해서 내놓습니다.'
'아이 연습용으로 구입했는데 치질 않네요.'
'아꼈던 아이인데 이사 가면서 긴급처분합니다. 보증서도 있습니다'

사연을 쓱 읽어본 나는 당근마켓에 올려져 있는 피아노사진을 확대해보며 군침을 다신다. 저 피아노는 어떤 음색을 가지고 있을까? 둔탁하고 막힌 소리가 날까, 부드럽고 영롱한 소리가 날까, 가볍고 맑은 소리가 날까, 저 피아노의 해머는 얼마나 무거울까? 하농을 쳤을 때 손가락이 느낄 피로감은 얼마나 될까.

어릴 적 피아노학원에 다닐 때, 친구집에 놀러 가면 꼭 다른 집 피아노를 한 번씩 쳐보고 싶은 그 마음, 종로 3가 낙원상가 2층 중앙복도에 나열되어 있는 번쩍번쩍하는 중고피아노를 한 번씩 눌러보며, 가게 주인아저씨들 앞에서는 마치 살 것처럼 상담받으면서 전문가도 아니면서 음색을 느껴보는 그 마음, 예술의 전당에 공연 보러 가서 한 대당 천만 원은 호가하는 스타인웨이 앤 손(대표적으로 가장 비싼 피아노 브랜드!!)은 해머가 과연 무거울까 상상하는 그 마음...


맛집 앞에서 군침을 흘리듯, 피아노 앞에서 군침을 흘리는 나의 본심은 가끔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행동으로 옮겨간다. 우리 집 앞 수서 SRT역 중앙 광장에 배치되어 있는 그랜드피아노에 연주하는 사람이 없을 때면, 슬쩍 앉아서 제일 잘 치는 곡을 2분 안에 쓱 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서는, '그랜드 피아노라고 해머가 무겁지는 않네?'라고 생각한다. 석촌호수에 배치된 버스킹용 피아노에 스리슬쩍 앉아서 10분이나 피아노를 가지고 이런저런 연주를 하며, '아... 버려진 피아노 치고는 음색이 나쁘지 않은데, 음이 3개나 소리가 안 나. 송파구청에서는 왜 이 피아노를 조율해주지 않는 걸까.'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석촌호수 버스킹 피아노(출처:아시아 뉴스통신)


나의 이런 호기심과 별도로 당근마켓에서 피아노를 파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피아노를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다.

'급하게 이사가게 되어 무료 나눔 합니다. 다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직접 운반해가셔야 해요. 빌라 4층입니다.'
'240만 원 주고 10년 전에 구입한 피아노예요. 연식은 오래되었지만 소리는 잘 납니다. 20만 원 헐값에 눈물로 내놓습니다.'
'소리가 좋지만 오래 치지 않아 음질은 보장 못해요. 조율해서 쓰실 분 가져가세요.'




피아노들은 분명 과거의 반려인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음이 분명하다. 초등학교 입학 후 피아노학원에 다니면서 '나비야'를 수없이 연주했을 것이고, 회당 10만 원이나 하는 조율사 선생님을 불러 음색도 조율받았을 것이고, 피아노 의자를 열어보면 모차르트 소나타, 하농, 체르니 30번 등 피아노학원의 교재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유행가요들의 악보도 몇 개 구매되어 있을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던 피아노가 버림받게 된 레퍼토리는 몇 가지 경우이다.

1) 초등학생 때 미친듯한 '하농, 체르니'의 반복으로 피아노를 사랑하기도 전에 지적 호기심은 사라져 버렸고, 부모들도자녀가 피아노를 더 이상 치지 않자 어쩔 줄 모르고 방치하는 경우

2) 초등학교 때 그럭저럭 피아노를 쳐서 반에서 반주도 몇 번 했으나 중학교 들어가면서 피아노학원에 더 이상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모종의 합의하에 학원을 그만두면서 피아노 치는 것도 그만둔 경우

3) 초등학교 이후까지 피아노학원에 다니며 피아노를 전공하는 길을 꿈꾸었으나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즉 잘 치면 잘 칠 수록) 레슨비가 비례해서 커진다는 걸 깨닫고 작가가 절필하듯 피아노를 절타한 경우...

그 밖에 아주 예외적으로는 아파트라서 치면 안 된다는 외부의 압력을 받은 경우이거나, 전자피아노의 발달로 나무피아노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경우다.

애증의 하농... 피아노레슨의 필요악이다. 노잼이지만 진짜 필요한 과목..

사랑을 받지 못한 피아노는 이제 악기가 아니라 애물단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피아노 위에는 갖가지 물건들이 놓이게 되는데, 가족들의 사진, 책, 때로는 먹고 난 요구르트병, 이불빨래 등이 놓인다. 엄마는 청소를 하면서 피아노위에 쌓이는 회색 먼지들을 걸레로 닦으며 '너 이제 피아노 안 칠 거니? 안 칠 거면 이거 남 준다!' 잔소리를 하고, 자녀는 또 그 잔소리야 하면서 못 들은 척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며 팔지도 못하다가 이사라도 가게 될 참이면, 치지도 않는 피아노 때문에 이사비용이 20만 원은 추가된다.


아무도 치지 않아 강제 침묵당하는 피아노는, 이미 좁디좁은 집에서 장롱에 버금가는 거대한 자리를 차지하는 고물밖에는 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몇 년간 방치된 피아노를 보다 못한 엄마는 드디어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래 팔자.


중고피아노 매수업체를 찾아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다. 10년 전에 240준 영창피아노인데요, 고장은 특별히 없어요.... 네, 네, 18만 원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생각 좀 해볼께요. 240만 원의 피아노가 단돈 18만 원밖에 안 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무뚝뚝한 매수업자의 목소리는 18만 원을 외치면서도 오히려 당당하다. 요즘 출산율도 떨어지고, 대체악기도 시장에 많이 나와있어, 피아노학원도 소리소문 없이 폐업하는 이 시대에 중고피아노를 찾는 사람은 줄어들어 18만 원이라고 해도 운반비 빼면 남는게 없다, 그러니 그 가격으로도 매입해 줄까 말까 하다고 한다. 헐값에 팔리는 피아노를 바라보니, 고려장을 하는 것처럼 서글프기도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는 가구일 뿐이다. 이때 떠오르는 건 바로 당근마켓. 그래, 누구라도 이 애물단지를 가져갈 사람을 구해보자. 구구절절 사연을 올리고, 직접 가져간다는 보장하에 50만 원, 30만 원, 20만 원, 10만 원.... 한 달이라는 기한을 꽉 채웠을 때 드디어 피아노 앞에는 0원, 나눔 딱지가 붙는다.

멀쩡한 피아노, 아름다운 피아노, 치지도 않아 이도 안 나가있고, 흠집도 없는 피아노들이 중고 우쿨렐레보다 더 싼 가격(중고 우쿨렐레는 대략 2만 원에서 4만 원 사이임)으로 당근마켓에 등록된다. 피아노가 감정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당근마켓에 0원으로 나눔딱지가 붙어있는 피아노보다 더 구구절절한 피아노의 운명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직장인일 때 혜화동에 20년이나 터줏대감으로 있던 피아노학원이 문을 닫게 되었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피아노를 대체할 악기들이 너무나도 다양해지고, 피아노보다는 코딩이 필요한 시대적 요구 때문에 피아노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매년 줄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해 보고자 피아노선생님은 학교의 실기시험, 오카리나, 리코더 등의 악기도 봐주기도 하였지만, 결국 피아노학원은 오랜 적자를 견디지 못해 폐업을 선언한다. 20년간 피아노학원을 지켜오던 피아노는 총 7대, 한 달에 1번은 조율받았기에 모두 소리는 멀쩡하다. 어쩔 수 없는 흠집들과, 이가 벌어진 건반, 눌리지 않는 2번째 페달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피아노는 여전히 영롱한 소리가 난다. 매입업자를 찾아보았지만, 피아노학원이 줄줄이 폐업하는 시국에서 이 늙은 피아노를 거두어갈 업자를 찾기도 어려운 선생님은 이제 피아노학원에 다니던 학생들에게 전화를 건다.

'피아노가 7대가 있는데요. 모두 멀쩡해요. 직접 가져가신다면 공짜로 드릴게요. 교재도 드릴게요.'

코로나... 피아노학원을 문 닫게 하다

공짜로 주겠다는 피아노를 받겠다는 제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거절한 제자 중 한 명은 바로 나였다. 나는 이미 우리 집에 나무피아노 1대, 전자피아노 1대가 있어 도저히 피아노를 더 이상 입양할 수 없었다. 이 애달픈 피아노의 운명 앞에서, 나는 엄마친구, 내 친구, 맘카페를 동원해서 피아노를 살 사람을 구해봤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결국 피아노는 분해되어 나무로 돌아갔다.


나는 오늘도 당근마켓을 뒤적거린다. 한때 총망한 꿈을 가지고 집에 입성했지만, 천덕꾸러기가 된 우리 나무피아노들... 여전히 아름답고 영롱한 우리 피아노들... 그 피아노를 다시 사랑해 줄 새로운 반려자와 인연이 닿기를 바라며...

피아노처분에 실패한 반려인들은 피아노 버리기로 목표를 바꾸기도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