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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링북, 두 장 칠하고 닫았습니다.

"몇 장만 칠했어요." 당근마켓에 내 놓인 컬러링북

by 박수소리

"엥? 웬 컬러링북 이래?"

"네 언니가 엄마 줬어."

오랜만에 부모님 댁을 찾았던 어느 날, 친정부모님의 식탁에는 컬러링북 2권과 24색 색연필이 놓여있었다. 멀리서 혼자 자취하는 언니는 자신이 필요가 없어진 물건들을 종종 부모님께 드리곤 했는데 이번엔 컬러링북이었다. 엽서로 쓸 수 있는 만화캐릭터 컬러링북과 화원을 묘사한 복잡한 도안이 있는 큰 컬러링북은 이미 2장씩 색칠이 되어 있었다. 학생 때 예쁜 공책에 1~2장씩은 열심히 필기해 놓고 공책을 덮었던 언니는, 성인이 되자 컬러링북에 2장만 색칠하고 덮어버렸다.

사진출처: https://www.vox.com/2015/9/2/9248663/coloring-book-history

언니는 영상편집 프리랜서다. 프리랜서의 특성상, 절대 프리(free) 하지 않다. 일이 들어오면 계약한 조건에 부합하려고 휴일, 밤낮 안 가리고 과업을 수행하고, 일이 안 들어오면 일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그동안 벌어놓은 수입으로 근근이 하루하루 버틴다. 어찌 보면 작품에 캐스팅되기를 기다리는 배우와도 같아서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업계에 평판이 좋아야 하며, 자신에게 일을 줄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도 중요하다. 학력도, 연줄도 없는 언니는, 10여 년간 별의별 고생을 다 거치며 영상편집 기술자가 되어갔다. 이제 막 등에 날개를 달고 날아갈 즈음, 코로나가 터졌다.

드라마나 영화업계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코로나는 점차 영상제작까지 마비시켜 버렸다. 일이 끊긴 지 1달, 2달, 3달... 그렇게 6달이 가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일이 끊긴 건 처음이었다. 작업장이자 숙소의 월세 70만 원에, 통신비와 식비, 교통비를 포함한 각종 생활비 70만 원.. 숨 쉬고 살아가는데만 매달 아끼고 또 아껴도 140만 원이 들어간다. 백수가 된 6달 동안 생존하는데 무려 천만 원이 들어갔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없을 텐데 언니의 사정은 뻔했다.

"언니 내가 돈 좀 줄까? 진짜 필요하면 말해."

"됐어. 진짜 급해지면 말할게."

자존심이 센 언니는 그 와중에 가족에게 한 푼도 손 벌리지 않았다. 너무 어려워질 무렵 언니는 단기영상편집 알바를 인터넷으로 근근이 해나가며 용돈을 벌었다. 그마저도 어려워졌을 때, 성인에로영화 편집을 하는 것까지 고려했다가, 결국 못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도 알바천국에는 영상편집알바 무한 모집중

백수가 된 지 이제 7개월째로 들어섰다. 순식간에 가난해져 버린 언니는, 빈곤한 자금사정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뜬금없이 서점에 가더니 컬러링북과 색연필을 구입했다. 월세 70만 원인 이태원 작업장에서, 귀에 거슬리지 않은 음악들을 틀어놓고, 아로마향초를 켰다. 연필깎이로 색연필을 하나하나 깎고, 컬러링북을 손으로 반듯하게 만들고는, 1장 색칠하는데 적어도 4시간은 걸릴 복잡한 도안들을 하나하나 색칠해 가기 시작했다. 한두 장쯤 컬러링북을 완성했던 어느날 전화가 걸려왔다. 일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문구점인지 잡화점인지 점점 구분이 모호해지는, 어떻게 보면 종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요즘 대형서점. 책 보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는데, 공간 자체가 재미가 있어서인지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예술 쪽 평대에 늘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컬러링북은 그 인기가 여전하다. 말이 컬러링북이지, 사실 한글로는 색칠공부 아닌가. 언제부터 성인의 문화생활에 색칠공부가 등장한 것일까? 나무위키에 의하면 그 시초는 2014년부터라고 한다.


2014년 8월 (주)출판사 클에서 조해너 배스포드의 비밀의 정원(도서) 컬러링북이 출간되면서 힐링 붐에 맞춰 한국에서 대중적인 트렌드가 되었다. 비밀의 정원(도서)은 올해의 책으로 선정이 되고, 모든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수개월 유지하고, 그 후로도 수년 동안 컬러링북 1위 자리를 차지하며 스테디셀러 반열에 올랐다.


비밀의 정원 도안은 매우 복잡하다. 수많은 꽃들과, 풀들, 그중에서 가장 칠하기 어려운 건 나뭇잎이다. 커다란 나무의 나뭇잎이 코딱지만 한 사이즈로 하나하나 그려져 있다. 삑사리가 안 나려면, 색연필을 날카로울 만큼 깎아서 섬세하게 색칠해야 한다. 6살 아이의 학습지 중간에 나와있는 색칠공부용 커다란 캐릭터를 아이와 함께 칠하면서도 지루함을 느끼는 나로서는, 비밀의 정원 책을 색칠하는 사람들이 성인군자 같다. 컬러링 콘테스트가 있어 누가 상 줄 것도 아니고, 다 그리고 제출하면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니고, 컬러링이 완료된 후에는 액자에 걸어놓을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복잡한 도안을 색칠해 나가는 걸까.

비밀의 정원 도안 중 하나(출처:https://hwabang.net/product/detail.html?product_no=61751)

컬러링북은 뇌를 이완하고, 스트레스를 풀고, 집중력을 향상하고, 명상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그 효과에 부합하는 컬러링북들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 색칠명상, 힐링 컬러링북, 시니어 치매를 예방하는 컬러링북 등 과거에 비해 현재는 다양한 연령과 대상 군을 겨냥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사실 컬러링북은 이미 도안 자체가 예술이다. 백색 종이에 그려진 도안은 그 자체로도 이미 아름다워서, 색연필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정성 들여 도안을 칠하면서, 우리는 조심스레 아름다움에 합류한다. 컬러링북의 도안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도안 자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뇌는 드디어 생각을 멈춘다. 생각이 멈추니 호흡이 느려지고, 어느새 졸음이 온다.


장장 7개월을 백수로 살아야 했을 언니는, 낮아진 자존감, 연락을 기다리는 초조함,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컬러링북에 색칠하면서 떠나보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상황에서(알고 보니 코로나에는 끝이 없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일을 기다린 지 7개월이 되었을 무렵, 숨이 턱턱 막혀오는 언니의 뇌를 컬러링북이 잠시 쉬게 한 것이다. 일이 막 시작되기 전 언니는 2장씩 칠한 컬러링북과 24색 색연필을 종이봉투에 욱여넣은채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일이 있다고 황급히 집을 떠나며 "엄마, 이거 재밌어. 엄마도 좋아할걸?"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언니는 초조함이 해결되자마자 그렇게 컬러링북과의 동거를 끝냈다.




예상외로 엄마는 컬러링북을 좋아했는데, 엄마는 자신이 공들여 칠한 컬러링산출물들이 보람되게 쓰이길 바랐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 집 냉장고에 자신이 칠한 컬러링 엽서를 잔뜩 자석으로 붙여놓고는 말했다.

"이거 어린이집 친구들 생일파티 할 때 네가 편지 써줘. 선생님들한테도 감사편지 써드려. 나머지 엽서들도 곧 칠해서 줄게."

시간이 좀 지나고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엽서 좀 썼니?"

언니가 제멋대로 산 컬러링북은 어느새 뜬금없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은연중 독촉을 받은 나는, 엄마의 기대에 따라, 엄마가 칠한 백설공주들 엽서 뒤에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받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언니가 엄마에게 버린 컬러링북은, 엄마의 손에 의해 다시 생명을 얻었고, 어린이집 친구와 선생님들의 이름이 적힌 순간 그 누군가에게는 재생용지로 분류해 버릴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오늘도 당근마켓은 누군가가 내놓은 컬러링북으로 가득하다.


"앞에 두 장만 색칠했고 나머지는 다 깨끗해요. 문고리 하는 조건으로 그냥 드려요."
"태교 선물로 받았는데, 도저히 시간이 없어서 내놓아요. 정가의 80% 가격으로 드립니다. 새 책이에요."
"36색 색연필과 컬러링북 세트로 드려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첫 4페이지만 제외하고는 하나도 안 칠했거든요."


누군가의 근심을 덜어준 컬러링북은 그 소명을 다하자 다시 당근마켓에 놓인다. 36색 이미 아름다운 색연필과 보는 것만으로도 예술인 도안들을 만나, 컬러링북은 또다시 누군가의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주겠지.


오늘도 당근마켓에서는 한 두 장 칠해진 컬러링북들이 새 주인을 기다리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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