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가 J와 눈이 맞은건 다 그 여름방학 때문이었다. 보라는 모자란 학점을 채우느라 여름방학때도 계절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인천이 집이라 학교까지 짧아도 편도만 1시간 30분을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수업 두 과목 달랑 듣고 또 다시 돌아가려면 1시간 30분의 지하철, 아니 출퇴근시간과 맞물리면 길고 긴 지옥철을 견뎌야 했다. 기나긴 시간 지하철을 견뎌, 걷고 또 걸어 도착한 교실에서,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듣고 나면, 보라는 이미 녹초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숨이라도 고르고 싶어 찾은 것은 바로 동아리방. 지방이 고향인 선후배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갔고, 서울에서 사는 멤버들도 알바다, 여행이다, 자격증이다 하며 아무도 학교에 발을 내딛지 않았다. 텅텅 빈 동아리방에서 전단지나 좀 정리하고 있던 차, 퀘퀘한 동아리방의 문이 열렸다. J였다.
"J? 웬일이야? 학교에 다오고."
"보라누나, 안녕하세요. 저 여기서 이따 과 친구들이랑 농구하기로 했거든요."
J는 우연찮게 학교와 지하철로 3정거장 거리인 꽤 가까운 동네가 고향(?)이었다. 집이 풍족해서 알바같은건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2학년이라 자격증시험을 준비할 생각도 아직 없었다. 그런 J와 같은 친구들이 학교에 종종모여 놀았다.
"밥은 먹었고?"
밥은 먹었고는 길가다가도 선배가 후배를 만나면 의례하는 인사같은거였다. 그 때 후배가 밥을 안 먹었다고 하면, 아 그래? 하면서 밥을 사주던게 그 당시 문화였다. 마침 자신도 배가 고팠던 보라는 선배이자 누나였기 때문에,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나 사먹으려던 J에게 밥을 사주었다. 뚝배기 불고기와 계란말이가 동아리방에 도착했다.
그 날 이후 보라와 J는 종종 마주쳤다. 아주 우연히도 보라의 계절학기 수업 종료시간과 J가 동아리방을 잠깐 들르는 시간이 맞았고, 허기지는 시간도 맞물려갔다. 아무리 선배라도 보라만 주구장창 밥을 살 수는 없었다. 보라가 한번 사면, 다음날 우연히 마주치면 J가 밥을 사고, 그 다음날에는 보라가 다시 밥을 샀다. 은연중에 '매일밥친구'가 된 보라와 J는 서로가 신경이 쓰였다. 어느날 J가 일정이 생겨 학교에 못 오게 되자, 보라에게 문자를 보냈다.
"누나, 저 오늘은 학교 못 가요. 내일 같이 먹어요."
아니, 같이 밥먹자고 사전에 약속도 한 게 아닌데, J가 보낸 문자에 보라는 신경이 쓰였다.
보라와 J는 그 날 이후, 안부메시지를 주고 받게 된다. 오늘 학교오냐고 묻다가, 비가 온다고 우산챙기라고, 또 뉴스봤냐고, 잘 들어갔냐고... 건조하던 메시지 중간중간에 이모티콘도 종종 등장했다.
보라의 가방이 계절학기 교재들로 무거워서 J가 지하철역까지 들어줬던 어느날, J와 나란히 걷던 보라는 유독 말이 없었다. 보라는 본래 NBA광팬이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이 늘 마이클 조던이었고, 생중계를 보겠다고 핸드폰으로 일정관리를 하고, 새벽까지 방에서 홀로 라이브 농구를 즐겼다. 그러고보니 J도 농구를 좋아해 매일 학교에 나오고 있었다. J가 메고 다니는 농구공이 그날은 유독 신경쓰였다. 말이 없던 보라가 J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 사귈래?"
그렇게 보라와 J는 커플이 되었다.
마이클 조던. (출처: 게티이미지)
보라와 J 모두 연애는 처음이었다. 학교가 개강하자, 동아리 사람들은 보라와 J가 커플이 되었다는 것에 모두 경악했다. 둘의 조합이 너무 생소했지만, 동아리 사람들은 놀라지 않은 척 보라와 J가 커플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보라와 J는 여름방학부터 개강 후까지 아직 싸운적은 없었는데도, 동아리 사람들은 보라와 J가 없을때면 둘이 곧 깨지지 않겠냐고, 동아리에 가뜩이나 사람도 없는데, 저러다 한 사람은 꼭 동아리 탈퇴한다고 걱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라와 J는 서로에게 첫 남자친구와 첫 여자친구가 되어 꽁냥꽁냥 캠퍼스를 활보했다. 도서관 열람실에 대기해서 나란히 앉아 공부도 하고, 학생회관에서 단무지와 중국산 김치 달랑 나오는 부실하고 저렴한 학식 먹으면서도 행복해하고, 편의점에서 1+1 아이스크림을 사서 같은 아이스크림을 캠퍼스 광장에 앉아 천천히 먹었다. 때로는 농구얘기도 했다. 해외농구까지 섭렵한 보라와 얘기하고 있노라면, 이렇게 말 잘 통하는 여자친구가 어딨겠냐고 J는 생각했다.
그렇게 보라와 J커플의 100일이 곧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J는 동아리방에 발을 뚝 끊었다. 보라도 마찬가지였다. 동아리 사람들이 걱정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한 명만 탈퇴하는게 아니고, 둘 다 탈퇴하는건가 토론하던 동아리 사람들이 회식하던 어느날, 초췌해진 보라가 호프집에 나타났다.
"J가 안 나오기로 했어요. 저는 나오고요."
보라는 감정을 감추는 법이 없었다. J와 깨졌고, 앞으로 자신은 동아리 활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J얘기는 자기 앞에서 하지 않아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J와 몰려다니던 무리들도 모두 동아리에 발을 끊었다.
2년이 흘러, 보라는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을 했다. 졸업한 후 보라와 친한 동아리 사람들이 일부 모인 자리에서, 잡다한 수다꺼리가 흘러가던 흐름에 휩쓸려, 보라는 어느새 J와 있었던 일을 자진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100일이었던 그 날, 보라는 J와 만나기로 한 호수벤치에 앉아있었다. 잠시후 저 멀리서 J가 뒤뚱거리면서 걸어왔다. 그의 품에는 대형곰인형이 들려있었다.
"보라야, 기다렸지. 나 이거 가지고 오느라고."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J는 여자친구 주겠다고 곰인형을 캠퍼스까지 굳이 들고 왔다. 원하던 선물은 분명 아니었지만, 보라는 저 곰인형을 들고 왔을 J가 귀엽고 대견해서 킥킥대며 웃었다. 벤치에 앉은 J은 주머니에서 또 뭘 꺼냈다.
"보라야, 잠깐 손 줘봐."조그마한 상자를 여니, 거기 은색 반지가 나왔다. 보라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더니, 반지가 조금 헐거웠다. 그래도 나름 철저한 준비를 한 J에게 보라는 내심 감탄했다. 보라와 J는 그날 내내 낑낑대며 곰인형을 학교 앞 레스토랑과 카페에 데리고 가, 등받이 있는 좌석에 앉혀놓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곰인형 옆에 앉아 우걱우걱 밥먹는 J를 보며 보라는 밥값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2호선은 그날도 붐볐다. 곰인형과 지옥철을 함께 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J의 선물에 보답하고자 보라는 헐렁거리는 반지를 낀 채, 곰인형을 있는힘껏 붙잡고 지옥철을 견뎌 인천까지 갔다.
[잘 들어갔지? 오늘 정말 고마워. 곰돌이 너무 예쁘다. 어디서 산 거야?]
[곰돌이 좋아하니 다행이다. 그거 중고나라에서 샀어.]
[음?? 중고나라?]
[응 사실 오늘 늦은 게 중고나라 거래하겠다는 사람이 좀 늦어서 나도 늦은 거야. 근데 곰인형 예쁘지?]
보라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깐 멍해졌다. 싸한 직감이 보라를 강타했다. 보라는 네 번째 손가락에 덜렁거리는 커플링을 빼서 유심히 보았다. 반지 안쪽 구석에 아주 작게 이니셜이 새겨있었다.
EM
아니, J이름도 아니고, 보라의 이니셜 BR도 아니고, EM이라니... 보라는 PC를 켜고 중고나라에 들어가 곰인형으로 중고나라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30초도 안 되어 보라의 곰인형이 나왔다.
"여자 친구랑 깨져서 곰인형이랑 반지 내놓습니다. 곰인형 8만 3천 원짜리고, 커플링은 10만 원인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급하게 다 합쳐서 3만 원에 내놓습니다.(오늘 중 급매원함)"
"아니, 어쩜 그럴 수가 있어요? 다른 커플이 깨진걸 그대로 나한테 주냐고요. 그게 걔예요. 아무 생각 없고, 성의가 없는 게. 아주 이기적인 놈이라고요."
보라는 2년 전 일을 가지고도 분개했다. 보라는 J가 준 곰돌이를 쳐다도 보기 싫은데, 중고나라에 다시 내놓았다가는 J가 볼까 봐, 아직까지도 집에 어쩔 수 없이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공짜로 준다고 해도 친구 누구 하나 곰인형을 원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돈이 없는 학생이라서, 처음 연애해 봐서, 뭘 몰라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그것이 사랑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지 않냐는 생각도 있었지만, 보라가 분노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전날 J는 보라와 함께 브랜드 매장에 가서 J가 신을 15만 원짜리 농구화를 새로 구입했기 때문이다. 중고나라에서 산 곰돌이도, 남의 이름 새겨진 커플링도, J가 쉽게 구입해 버리는 15만 원짜리 농구화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했다.
J와 보라가 각자의 길을 간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이제 사람들은 중고나라보다 당근나라, 아니 당근마켓에 더 친숙하다. 종종 커플링과 대형곰돌이가 같이 올라올 때면, 나는 다시 J와 보라의 사랑을 깨트린 곰인형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