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통증과 함께 눈을 뜬 우재는 작업대 위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하얀 작업대는 벌건 피로 흥건했다. 반사적으로 작업대 스위치를 내렸다. 새벽 5시였다. 야간조의 근무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작업장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했다. 우재는 데스크에 있는 휴지를 가져다가 손을 감싸고, 다치지 않은 다른 손으로는 119를 불렀다.
"여기 **사업장 제5공장인데요. 손을 다쳐서 병원으로 긴급하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다치신 분은 누구신가요?"
"본인입니다."
강한 통증이 밀려들어왔지만, 우재 본인도 놀랄 정도로 우재는 침착했다. 단 한 번의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너무 큰일이 벌어지니 마치 이 모든 상황이 남일처럼도 느껴졌다. 우재와 함께 작업하던 다른 동료들이 신고전화 소리를 듣고서 그제야 우재 곁으로 왔다. 우재는 그렇게 검지손가락 반마디를 잃었다.
사고가 있었던 새벽 5시, 우재는 벌써 13시간째 일하고 있었다. 야간조여서 밤 10시경 출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식일정이 있는 다른 동료들의 사정을 봐주느라 그날은 예외적으로 일찍 출근했던 것이다. 누구 탓할 것도 없었다. 아니, 누구 탓할 정신도 없었다. 큰 일 앞에서는 온전히 혼자였다.
119 구급차(사진출처 : 충남일보)
수술이 끝나고 입원실에 돌아온 우재는 다음 할 일을 생각했다. 병원에 보호자를 등록해야 해서 아버지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다. 느그 병원이 어딘데?"
큰일이 있음에도, 여전히 1분도 지속되지 않는 무뚝뚝한 경상도 부자간의 대화였다. 그다음은.... 아, 맞다. 이번주 일요일에 아직 졸업하지 않은 대학교 후배들 밥 사주기로 했는데... 우재는 밥 사주기로 한 후배 중 남자후배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약속을 취소했다. 그다음은 또 뭘 해야 하지... 그다음은.... 기브스를 한 채 한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있는 우재 앞에, 회사 임원이 나타났다. 2년 전 우재가 이 회사에 입사하던 날, 악수 한번 한 후로 임원과 대화해 본 건 처음이었다. 임원은 위로와 함께 우재가 산재처리되었으며, 3개월 간 유급휴직처리하였으니 아무 생각하지 말고 회복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일주일만에 자취하는 빌라로 돌아온 우재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정적이었다. 컴컴한 원룸에 불을 켜고, 정적을 없애기 위해 라디오를 틀었다. 오후 2시, 유쾌한 DJ가 게스트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웃어댔고, 빠른 리듬의 댄스음악이 이어져 나왔다. 컴퓨터 앞 의자에 앉은 우재는 멍했다. 빌라도, 라디오의 DJ도, 가구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어쩌면 지난 일주일간 벌어진 일이 드라마에서 본 남일 같았다. 하지만 그 일은 진짜였다. 우재가 라면을 끓이기 위해 라면 봉지를 뜯을 때, 라면을 봉지에서 뺄 때, 젓가락으로 휘휘 라면을 저을 때... 라면을 끓이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마다, 반마디가 없는 검지손가락이 나타났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정말 일어난 일이었다.
라면냄비를 컴퓨터 책상으로 옮기는 중, 우재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숱이 없는 머리, 건선으로 각질이 일어나 있는 이마, 검은 피부, 말라빠진 다리, 그리고 반마디 없는 검지... 자신이 봐도 참으로 못 생기고, 초라했다.
우재는 3남매의 막내였다. 둘만 낳아 잘 살아보려던 차, 셋째가 들어섰다. 얼굴도 동그랗고, 눈도 동그란 아기는 통증 1시간 만에 순풍하고 나오더니, 세상에 나와서도 속을 섞이는 법이 없었다. 기저귀에 쉬를 해도 불편하다고 울지도 않고, 놀아달라고 보챈 적도 없었다. 커서는 학원 하나 보내달라고 한 적도, 용돈을 달라고 말한 적도 없는 아이였다. 알아서 잘 크는 셋째를 보고, 아버지는 대견하고 기특해서 꼭 한마디 했다.
"아이고, 이놈의 진차이~ 알아서 잘 큰데이."
*진차이 : 경상도 지방 사투리로 통영-거제 지역에 많이 쓰인다. 공연히 (아무 까닭이나 실속이 없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계획 없이 낳은 자식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말을 잘 들어도, 공부를 잘해도, 늘 '진차이는 잘한다'라고 칭찬받았는데, 진차이는 단순히 애칭만은 아니었다. 1980년대 출산정책의 변화로 둘만 낳아 잘 키우자가 표어가 되면서, 셋째까지는 세금 우대나 회사 학비 지원 대상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차이는 알아서 잘 커줬지만, 빠듯한 살림에 벌이도 시원치 않으니, 셋째에게 들어가는 돈은 모두 '진차이'였다.
"진차이..."
우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1983년 가족계획포스터(출처:http://www.siju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791)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를 켜고, 공원을 걷고, 낮잠 자고, 라면을 먹고, 드라마를 보다가, 순간순간 멍해지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아무에게도 걸려오는 전화가 없었다. 하루에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던 어느 날 우재는 불현듯 이렇게 3개월의 유급휴직을 날려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차이로 태어났지만, 진차이로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장실 가서 손 씻을 때조차 거울을 외면하던 진차이는 드디어 자신을 직면하기로 했다.
그래, 일단 운동이라도 하자. 우재는 동네 놀이터 철봉에 매달리는 것을 시작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모두가 학교와 일터로 나간 그 시간,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햇볕이 비쳤다. 어떤 운동을 해야 할까. 우재는 순간 어릴 때 보았던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렸다. 포레스트 검프는 뛰고 또 뛰었다. 처음에는 놀이터 5바퀴로 시작하다가, 놀이터에서 집까지 뛰었고, 또 동네 하천으로, 동네 공원으로, 동네 산으로... 한 달이 지났을 때 우재는 마라톤대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있었다. 운동강도를 높이고 싶었던 우재는 증량밴드를 사서 자신의 손목과 발목에 채웠다. 운동이 끝나면 온몸에 땀이 흥건했고, 증량밴드를 풀고 샤워할 때는 몸이 가벼워져 날아갈 것 같았다. 운동이 고단해지니, 다친 손가락에 대한 근심은 잊고, 푹 자기 시작했다. 유급휴직이 끝날 무렵 우재는 10킬로 마라톤대회에 출전한다. 동네에서 연습할 때는 증량밴드를 차고 뛰었는데, 대회에서 증량밴드를 풀고 뛰니 10킬로도 가뿐하고 가볍게 뛸 수 있었다.
우재의 3개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제야 우재는 다친 그날, 자신이 병실에서 취소했던 후배 밥 사주기 약속을 떠올렸다. 우재가 다쳤던 그날, 후배 3명은 서울에서 2시간이나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우재를 보러 왔었다. 그중에 P는 엄마가 만들어줬다며, 보온병에 전복죽도 쒀가지고 왔는데, 보온병도 돌려줘야 했다. 후배들이 사고당한 나를 동정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식당에 밥 얻어먹으러 온 후배들은 자소서(자기소개서) 벌써 몇 십번째 쓰는게 말이 되냐며, 문과는 무조건 서류광탈이라며(서류면접에서 바로 떨어지는 것), 취업캠프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토익이며 자격증 뭐 하나 나무랄게 없는데도 떨어뜨리면 도대체 누굴 뽑는거냐며, 자기네 걱정만 잔뜩 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우재는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증량밴드 차고 무작정 뛰는 운동으로, 진차이라는 별명을 스스로 떼내었던 28살 우재는 이제 40살이 훌쩍 넘은 아저씨가 되었다. 홈트레이닝 만으로 등근육과 가슴근육이 생긴 우재는 여전히 자신이 사고당했던 그 회사에 다닌다. 동료들은 티셔츠를 입어도 벌크업된게 티가 나는 우재에게 어디 헬스장 PT 받냐며 묻지만, 우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헬스장에 간 적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운동, 증량밴드, 턱걸이, 뛰기, 철봉운동만 계속했을 뿐이다.
반마디 없는 검지를 감추느라 늘 붙여놓았던 대일밴드는 후배 P와 연애하는 과정에서 진작에 떼버렸다. 후배 P는 애초부터 우재의 다친 손가락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우재가 다쳤던 그날도, 2리터짜리 보온병 한가득 전복죽을 싸가지고 와서는, 우재에게 어떻게 다쳤는지 얼마나 아픈지 묻지도 않고, 여기 병원에서 자기 집까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걱정하며 마을버스 노선만 주야장천 연구하다 가버렸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재의 손가락이 반마디가 있건 말건, 종종 짐을 들어달라고 거리낌 없이 부탁하고, 우재가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건 말건 왼손오른손 아무 손이나 잡고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우재는 세상에서 자기 손가락에 가장 무심한 P와 결혼했다. P는 요즘 나이가 들어 근감소증이 오는 것 같다며, 우재가 10여 년 전 차고 다녔던 증량밴드를 차고 아이 등하원을 한다.
삶의 무게가 가장 무거워졌을 때, 우재는 증량밴드로 몸을 더 무겁게 함으로써 오히려 가벼워졌다. 요즘도 종종 삶이 버거워질 때마다 우재는 생각한다. 그때 겪었던 일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 진차이는 앞으로도 알아서 잘 살 거라고...
필라테스같은 멋진 운동이 많은 시대에, 증량밴드도 당근마켓 무료나눔딱지를 피해갈 순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