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조금 넘어 오늘의 목적지 까리온으로 출발했다. 이곳은 메세타 고원이라서 공기가 유난히 좋다. 밤하늘의 별들도 선명하다. 어릴 적 저녁을 먹고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바라보았던 별 빛처럼 반짝거림이 짙다. 높은 메세타 고원이 주는 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일행은 조금 늦는다고 먼저 가라고 톡이 와서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방향을 찾으며 걸어갔다. 만에 하나 길을 잘못 들면 돌아와서 다시 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깜깜한 곳에 우리 단둘이 가고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찾아가야 한다. 다른 일행을 6시 30분에 만나기로 해서 우리는 천천히 가기로 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 휴대폰 손전등에 의지하고 가려니 두렵고 무서웠다. 갑자기 뭐가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과 어둠이 주는 답답함이 다. 차츰 밝아 올 거라 위안 삼고 미카엘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걸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이 없어서 아직 조용하다. 몇 번의 방향을 바뀌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 때마다 '이 길이 맞는 건가? 혹시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까?' 하며 조바심이 났다. 가다가 노란 화살표가 없으면 갑자기 엄습해 오는 불안감, 그러다 노란 화살표를 보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수로의 멋진 풍경을 사진 찍으며 왔다는 일행을 만나 같이 걸으니 마음이 안정되고 좋다.
어느 정도 지나자 둑길이 이어진다. 꽤 넓은 인공 수로에 물이 가득 차 묵묵히 흐르고 있다. 물이 있어 나무도 제법 많았다. 밝은 낮에 이곳을 걷는다면 멋진 경치를 제대로 볼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5km 정도의 인공 수로가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이곳을 운행하는 배가 제법 큰 것이 있었다. 농산물과 여러 가지 물건을 운송하는 수단을 배로 하는 것 같았다. 고원지대라서 물을 저장해 수로로 이용하고 농사에도 활용하는 이곳 주민들의 지혜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 마을을 지나치고 두 번째 마을 프로 미스타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커피와 빵을 주문해 먹고 좀 쉬었다. 다시 두 번의 동네를 지나 도로 옆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일행을 먼저 보내고 우린 천천히 걸었다. 12km 지점 다리를 지날 때 무거운 배낭을 마치 지게에 지고 가는 듯한 모습의 일본인과, 수염을 기르고 머리 꼬랑지를 세 갈래 땋은 개성 넘치는 분과 사진을 찍었다.
오늘은 도로 옆으로 계속 길이 이어졌다. 한참을 간듯해서 이제 끝이겠지 하면 또 이어진다. 한번 틀어진 길에서 나무에 올라간 독일 아저씨가 사탕을 던지며 능청스레 "부엔 까미노“ 하고 외쳤다. 어제 음악회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분인데 이런 장난기가 있다니 웃음이 나왔다. 가다 보니 도로 옆길에는 언제 지나갔는지 양 똥들이 많아서 이리저리 피해 가며 걸어갔다. 냄새가 심하진 않았는데 양들의 배설물이라 느낌은 좋지 않았다.
도로 옆 이어지는 길옆으로 쪽 쭉 뻗은 나무들이 싱그럽다. 그리고 가다 보니 늘어진 능수버들을 70년대 여학생 단발처럼 자른 곳이 있어 사진을 찍었다. 그 뒤에도 도로 옆으로 이어진 길은 목적지 마을을 다 오도록 이어졌다. 지루한 길이었다.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마을로 들어서고 산타마리아 알베르게로 가는 길에는 장이 서고 있다. 옷과 채소 그리고 잡화들로 노점상이 장사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오후 2시까지만 열려 파장을 하는 분위기다. 시장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 오늘의 숙소를 찾아 들어갔다. 그곳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맞아 주었다. 이곳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짐을 가져갈 때는 자원봉사자가 들어주어 수월했다. 오늘은 60명이 묵는 숙소다. 자는 방은 대충 세보니 이 층 침대가 10개였다. 우린 1층 침대로 달라고 요청하여 배정받아 짐을 정리하고 씻었다. 씻고 빨래하는 동안 원일이 라면을 끓였다. 두 개 라면을 갖고는 5명이 부족해서, 라면에 감자, 양파와 스파게티 면을 넣고 끓였는데 그냥 먹을만했다. 그러고 나서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내일은 40킬로를 걸을 예정이라 영양 보충을 위해 삼겹살을 먹자고 했다. 아침 먹을 것까지 함께 장을 보니 1인당 8유로 정도다. 삼겹살 세 팩과 목살, 상추, 천도복숭아, 요플레, 달걀 등을 샀다.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안마당에서는 봉사자와 순례자가 타악기에 맞춰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미카엘은 달걀을 삶고 삼겹살도 미리 구워 놓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편안하게 먹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고기가 무척 많았다.
마른빨래를 정리하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들으며 동영상을 찍었다. 일행이 내려와 저녁을 같이 준비하여 푸짐하게 만찬을 즐겼다. 우린 삼겹살을 구워 맛있게 먹었는데, 주변까지 고기 냄새가 진동해서 좀 미안했다. 알베르게 근처에 성당은 있었으나 소주를 마시고 시간도 맞출 수 없어 미사에 가는 것은 포기했다. 저녁을 먹고 산책하러 가는데 미사 드리고 나오는 어르신들이 보인다. 우린 배도 부르고 공원 벤치에 편하게 누워 밤하늘을 보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