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아르수아 알베르게에서 나와 마을을 20분 걸어 빠져나왔다. 영혼들을 모시는 공동묘지가 마을마다 가끔 있었는데, 숲길 시작 전에 있었다. 낮에 볼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깜깜한 어둠 속과 숲길이 시작되는 시점은 느낌이 확 달랐다. 25층 아파트처럼 치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로 길이 쭉 이어졌다.
낮에는 녹색과 그늘로 시원하게도 하고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나무지만, 어둠 속의 나무는 두려움을 가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별빛과 달빛을 차단해 칠흑의 어둠 속에 갇혀 걷게 한다. 어둠 속 길을 가는데 상수리나무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은 간담을 서늘케 한다. 그러다가 부엉이가 갑자기 울면 더욱 심장은 쪼그라들고 만다
새벽 숲 길에서 본 달
아파트 25층 높이의 나무숲 사잇길을 20분 넘게 걸어가는 중압감에서 겨우 해방될 무렵에 남자분이 앞서 걸어가고 계셨다. 우리보다 먼저 출발하고 그것도 혼자 이 길을 걷고 계셨다니 놀랍다. 그분을 앞서고 한참을 걷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의 불빛이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까미노를 걷고 계신 분임에 틀림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체구가 아담한 것 봐서는 여자분인 거 같다. 흰 잠바를 입고 있는데 다가가 용기를 내어 "올라" 하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오 세브레이로를 내려오다 트리아 카스텔라 마을 맞은편 바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어르신이었다. 선크림을 하얗게 바른 모습이 영락없는 일본인 같았다. 그런데 우리 보고 반갑게 한국말로 인사한다. 깜짝 놀라서 한국분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셨다. 체구는 작으신데 나이는 좀 들어 보이셨다. "저희는 일본 분인 줄 알았어요." 라고 했더니, 그러냐며 웃으신다. "혼자 이렇게 새벽에 걸으시면 무섭지 않으세요?" 하고 물었더니, 당당하게 " 무서우면 이 길을 걷겠어요?" 하며 오히려 반문하신다. 정말 대단한 어르신이다. 또 뵙자고 하며 인사를 나누고 먼저 걸었다.
작은 마을 알베르게에서 여자분이 나오셨다. 알고 보니 콜롬비아에서 오신 여자분이었다. 같이 다음 마을까지 걸어와서 화장실도 갈 겸 커피를 주문하고 쉬었다. 콜롬비아 여자분과 아까 만났던 한국 여자분이 들어오셨다. 콜롬비아 여자분은 빵과 커피를 주문하고 한국분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문해 드신다. 우리도 커피를 한 잔만 주문해서 가져온 도넛과 과일을 먹었다.
한국분에게 연세를 여쭈어보니 73세라고 하셨다. “프랑 길을 걷는 것이 이번이 세 번째예요, 7년 전에 다녀가고 작년에도 걸었지, 그런데 올해는 너무 힘들고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아요. 난 매일 길 위에서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을 걷고 있다오.” 정말로 대단하신 체력이다. 오다가 바에서 한 번 더 뵈었다. 우리 부부를 보고 “ 앞으로 살아가면서 대단한 은총이 함께 할 거예요.” 하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어느 정도 걸어오자 술병으로 장식을 다양하게 한 바가 있었다; 병으로 장식된 모습들이 눈호강을 시켜 주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켜고 동영상을 찍었다. 오픈했다면 들어가서 맥주라도 시원하게 마셨을 텐데 아쉽게 문을 열지 않았다. 신발을 화분처럼 활용한 모습도 특이하니 예뻤다. 힘든 순례자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준 bar주인에게 고맙다. 그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나니, 마음이 정화된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그 후 시원한 숲길을 걸었다. 숲길을 빠져나오면 도로가 그 길을 이어준다. 마지막 큰 마을 오페드르소에서 바를 들어가지 않고 바로 숲길로 들어섰다. 다음에 마을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뒤로 아무리 걸어도 Bar를 찾을 수 없었다. 발과 다리는 아프고 점점 힘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힘들고 지치니 또 미카엘이 미워지기 시작한다. 무조건 걷는 거에 욕심을 부리며 제 때 휴식하지 않는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이때 누군가 써 놓은 글 귀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영어로 쓰여있는 말을 해석해 봤다.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증오는 당신을 억압한다}는 문구였다. '오~ 맙소사,'
미워하는 마음을 갖으려 할 때 눈 앞에 확 나타난 문구는 뭔가? 다시 미운 마음을 누그러 뜨린다.
미카엘은 눈치를 채고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그러고도 거의 3킬로를 걷고 바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점심 식사는 없고, 빵과 피자만 있었다. 할 수 없이 맥주 두 잔과 피자를 시켜 먹는 중에 어제부터 앞에서 손을 잡고 걸었던 다정한 이탈리아 부부가 왔다.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대단하다고 했더니 유투라고 한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탈리아 부부와 함께
오늘은 33km를 걷는다. 몬테 도 꼬죠에 도착하여 부친 배낭을 찾고 숙소를 가려고 했으나 400명이 묵는 공립 알베르게 숙소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정말 걸을 힘이 없었는데 다시 사설 알베르게를 찾았다. 배낭을 각자 메고 한참을 걸어서 갔고, 둘만 묵는 방을 얻어 짐을 풀었다.
침대 두 개 있는 방이 26유로이고 저녁 식사로 16유로를 썼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 아닌 오늘은 좀 한가로운 곳에서 보내고 싶어서 과한 비용을 지불하기로 했다.대부분은 산티아고 21km 전에서 숙박을 하고 이튿날 산티아고로 입성한다.
우린 기왕이면 산티아고 5km 전에 몬테 도 고죠라는 작은 마을까지, 기를 쓰고 걸어서 묵고 이튿날 6시에 도착하려고 한다. 산티아고를 가기 5km 전에 오니 마음이 더 설렌다. 갑자기 이상우의 노래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 노래가 생각났다. 흥얼거리며 지나간 시간을 잠시 회상해 본다.
막상 오려니 이것저것 일들이 걸려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둘째 딸이 무조건 가라고 부추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다음으로 미뤄 아마 다시 시간 잡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갑자기 콧등이 시큰해진다.아마 산티아고에 가면 너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내일 일찍 도착해서 열 명에게 주는 혜택으로 무료 식사도 하고 사진도 마음껏 찍고 싶다.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