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리뷰 - 시를 잊은 그대에게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강의 - 정재찬 지음

by 신미영 sopia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국어교사들을 가르쳐 온 정재찬 교수의 수업방식은 특별하다. 흘러간 유행가와 가곡, 오래된 그림과 사진, 추억의 영화나 광고 등을 넘나들며 시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모습이 한 편의 콘서트를 보는 것 같다. 그는 시를 사랑하는 법보다 한 가지 답을 말하는 법을 먼저 배워 온 학생들에게 시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들려주고 싶었다. 한동안 제자들을 위해 시와 아름다운 낭만의 글을 쓰고 그들과 공유해 왔다. 공학도들은 대부분 이미 시를 잊거나 배우지도 않아서 시를 읽고 즐길 권리마저도 없는 젊은이들이다. 저자는 인스턴트에 길들여진 그들에게 시의 깊은 맛을 전하기 위해 레시피를 만들기로 했다. 그 기쁨과 기대가 그들과 함께한 글들을 추려 모으게 했다. 그래서 시를 가까이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책으로 펴내게 되었다. 저자는 주제를 만들어 46편을 시를 소개하면서 서평을 썼다.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소리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즐거운 편지 /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맬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오리라



황지우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이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훤히 내대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각기 한 가지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에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분홍빛 양귀비꽃인지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이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




시는 맑고 순수하다. 시를 읽고 있으면 마음까지 맑아진다. 들 꽃처럼 수수함과 생명력이 있다.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울림을 준다. 이 책은 정재찬 교수가 교양강좌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한 시 에세이다. 저자가 선택한 46편의 시는 우리가 익히 앍고 있는 친숙한 작품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 안에서 시를 소환하여 당시의 추억을 떠 올리게 한다. 스치고 지나쳤거나 시간 사이로 엿보았던 시가 되살아나 가슴을 촉촉이 적셔 줄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의 말을 인용하면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정서적인 여유로움에 시가 필요한 이유이다. 감성의 시와 저자의 서평을 읽으며 각자의 학창 시절과 추억을 회상해 보시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