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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 2009년 34쇄 / 장영희 / 326page

by 신미영 sopia

<문학의 숲을 거닐다>의 저자 장영희 교수는 1952년에 영문학자 고 장왕록 박사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장애 1급이 되었지만 어려움을 딛고 서강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미국 유학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1985년부터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번역가,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1987년부터 한국일보 계열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에서 격주로 Crazy Quilt (조각이불)이란 영어 칼럼을 13년 동안 기고했다. 장영희 교수는 평생 목발에 의지해 생활했으며 2001년 유방암, 2004년 척추암을 이겨 낸 뒤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간암으로 전이되어 투병을 하다가 2009년 5월 57세에 소천하였다. 장영희 교수는 강단에서 일관되게 긍정, 희망, 밝음을 전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번역서로는 <종이 시계> < 햇볕 드는 방> <톰 소여의 모험> <이름 없는 너에게>등이 20여 편이 있다. 저서로는 <내 생애 단 한번> <슬픈 카페의 노래> <이름 없는 너에게> 등이 있다.


이 책은 2001년 8월부터 3년간 <조선일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북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들을 모아 엮었다. 저자는 영문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만났던 문학작품에 관심을 갖고 소개했다. 장영희 교수는 칼럼을 통해 독자를 만날 때 마치 숨겨 놓은 보석을 하나씩 꺼내 보듯, 새로운 감회에 젖었고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61편의 에세이에는 그 작품이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문학의 숲 '에 풍성한 열매가 되어 어떤 찬란한 향기와 양식이 전달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프거나 상처를 받아도 위로하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 가는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같이 놀래?" 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내미는 저자의 "손내밈'이라 할 수 있다. 문학의 숲을 함께 거닐며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믿음의 초대이기도 하다. 독자에게 살아갈 희망과 용기를 얻기를 바라며 화합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장영희 교수는 유학시절 자료들 중에 브루닉 신부님께 선물로 받은 성경을 발견했다. 신부님은 대학 스승님으로 삶의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신체장애에 대한 사회인식이 없던 70년대는 중.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힘들 때였다. 아버지와 여러 대학을 찾아다니며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합격해도 장애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당시 서강대학교 영문과 과장님이셨던 신부님께서는 장애인이 시험을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셨다. 신부님은 우리말을 배우고 계셨지만 이미 환갑을 맞은 나이라 별 진전이 없어 발음이 안 좋았다. 신체장애를 겪고 있던 저자에게 대학 4년 동안 필수과목이던 체육 점수받는 일은 상당히 힘겨웠다. 대학 3학년 때 장마 때문에 세 번을 결석하게 됐을 때 담당교수가 F를 주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교수님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 부당함 등으로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저자는 브루닉 신부님을 찾아갔고 눈물까지 흘리며 같이 공감해 주셨던 걸 기억했다.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남지. (P. 81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중에서)


저자의 아버지(고 장왕록 박사)의 묘비명엔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을 좋아하고, 책을 즐기며/ 외길 걸어온 인생/ 어느덧 물 내린 가지 위에도 /화사한 꽃, 열매 영글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환갑 기념 논문집에 쓰셨던 글로 새겼다. 예이츠의 묘비에는 "삶에, 그리고 죽음에 차가운 시선을 던지라/ 마부여 지나가라!"라고 쓰여 있다. 에밀리 디킨슨의 묘비에는 아주 짧게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저자가 인상 깊게 본 묘비문은 아버지가 적어 놓으셨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어느 성공회 주교의 글 내용이다. <중략~ 마지막 시도로,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지!> 저자는 아버지를 순수하게 학자의 외길 인생을 기쁘게 살다 가셨다고 추억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서강대 교수들은 소위 '업적 보고'라는 것을 한다. 지난 1년간의 학문적 교육적 업적을 점수로 환산하여 학교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국내 학술지 논문이나 전공 서적, 그리고 교육활동이나 학생들에게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 점수를 주는 제도이다. 그런데 점수 기준 평가표를 보면 소설집, 시집이 권당 5백 점인데 반해 수필집은 0점인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수필은 학문과 별로 관계가 없고 재능과 노력 없이도 '아무나 쓸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게 아닐까?' 저자는 생각했다. 저자가 인상 깊게 읽은 수필은 헬런 켈러가 쓴 <사흘만 더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이었다. 헬렌 켈러는 시각과 청각의 중복 장애를 극복한 본보기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문필가였다고 적었다.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갈망에 사로잡힌다는 문구를 인용하여 두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사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30년도 더 볼 수 있으니 마음은 백점이라며 행복해했다.

보지 못하는 나는 촉감만으로도 나뭇잎 하나하나의 섬세한 균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면 혹시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첫 징조, 새순이라도 만져질까 살면서 나뭇가지를 쓰다듬어 봅니다.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촉감으로 그렇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데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래서 꼭 사흘 동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은 지 생각해 봅니다. 첫날은 친절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 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랫동안 숲 속을 거닐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보겠습니다. 찬란한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날 밤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을 지켜보겠습니다. (P. 151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장영희 교수는 10여 년간 미국 문학 월든(Walden, 1854)을 가르쳤는데 월든 호수를 처음 보고선 신의 손길이 창조한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고 표현했다. 저자는 월든을 읽으며 '나는 어디에서 살았고,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는 제목에 특히 묵상하게 된다. 사실 '어디서 살았느냐'의 답은 확실하다. 저자는 유학했던 6년과 보스턴에서 보낸 안식년을 제외하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대한 답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월든이 쓴 '삶의 골수까지 빨아내는' 문장에 감탄하며 이것이 근접한 모법답안이라고 생각했다. 장영희 교수는 한동안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해 화두를 자신에게 던져 보기도 했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키부츠로 떠난 제자에게서 어느 정도의 답을 발견하게 되었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통해 제자들이 그 안에서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답이라는 위안을 얻게 된다.


태양 때문에 알베르 카뮈가 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한다. 평범한 월급쟁이인 뫼로 소가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다음날 여자 친구와 수영하고 희극영화를 보며 잠을 잔다. 그러다 며칠 뒤에는 해변에서 친구와 다투고 있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내용이다. 그를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 질문에 뫼로소는 살인을 종용한 태양 때문이었다고 답했다. 알베르 카뮈는 태양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뿜는 듯했다고'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뫼르소의 행동을 통해 카뮈는 기본적으로 삶의 허무와 부조리를 말하고 있다. 부조리의 인식은 어쩌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는 것이다. 카뮈는 영역본 서문에서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장영희 교수는 때로 사회 기준을 따라야 하고 우리는 자신을 숨기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뫼로소는 연기를 하지 않았기에 결국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이방인으로 남았다고 결론 내렸다.


편견이라는 말은 개인적인 소견이나 편의대로 남의 겉모습, 첫인상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 버리는 경우에 사용된다. 저자는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했다. 아름답고 온순한 맏딸 제인에 비해 지적이고 총명한 둘째 엘리자베스는 빙리의 친구 디아시에 대해 첫인상만 보고 오만한 남자로 생각한다. 디아시는 활달하고 발랄한 엘리자베스를 좋아하게 되지만 편견으로 반감을 갖게 된다. 그러다 사건과 집안 문제에 부딪히면서 편견을 버리고 디아시가 너그럽고 사려 깊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장영희 작가는 <오만과 편견>은 단순히 두 자매의 결혼 성공담에 불과한 것 같지만 절묘한 구성과 함께 날카로운 성격 묘사로 영문학의 백미에 속한다고 평했다. 편견이 인간관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고 그 편견이 사라질 때 좋은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번지르르한 말보다는 마음을 볼 줄 아는 아이들의 반듯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고 적었다.


저자는 연재했던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를 책으로 묶어 내는 일, 논문을 마무리하는 일, 번역 한 권을 시작하는 일, 어머니와 여행을 떠나는 일 등... 이런 것들이 성사된다면 행복할 것 같았으며 그런대로 잘 나가고 있다고 자부했다. 보스턴에서 건강검진을 하다가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해서 깨끗이 완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목 뒤 경추 3번으로 전이되었고 척추암이 또 발견된다. 저자는 병실에 입원해서 생명을 생각하며 끝없이 마음이 선해짐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살아 있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 나라는 경고로 받아들인다. 나흘 만에 보조기를 신고 일어섰을 때 직립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서서 보는 하늘이 얼마나 화려한 지, 모든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3년 만에 쓰던 칼럼을 접고 문학의 힘이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다시 일어날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고전을 통해 그 책을 기억나게 하고 읽고 싶게 만든다. 장영희 교수는 자신이 평소 즐겨 읽었던 책을 선물처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다양한 고전의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들에게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든다. 자신의 인생과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 고전 문학의 유사성, 아름다운 시들을 통하여 고전문학의 장르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 책은 기존에 알고 있던 문학 작품들이 어떻게 마음에 와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들로 인해서 저자의 삶이 얼마나 더 풍요롭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게 해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며 열심히 가르치고 사색하며 마음을 나눌 줄 알았던 장영희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장영희 작가는 고인이 돼서 우리 곁에 없다. 하지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읽고 사유하며 행복하게 거닐 수 있었다.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한 작품들도 문학의 숲을 산책하는 느낌으로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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