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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qrie Dec 05. 2024

오펜하이머 vs. 이육사

(2023.08.20)

최근 관람한 영화 (오펜하이머)와 읽은 책(강철로 된 무지개 :다시 읽는 이육사)을 통해 두 동갑내기(1904년생)의 삶을 겹쳐 보게 되었다. 


https://youtu.be/oSqK_v6zPoM


일제의 고문으로 이육사가 죽어가던 무렵은 오펜하이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충실히 원자폭탄 과업을 완성해 가던 시점이었다. 타고난 명석함과 다양한 지식을 통해 국가 혹은 민족 앞에 충심을 다했으나, 이육사는 베이징 지하에서 결국 고문 끝에 억울하게 죽임당했고 오펜하이머는 성공적인 개발 완수 뒤에 불명예스럽게 퇴진당했다. 공통점을 더 찾자면 철저한 검열의 시대였던 만큼 둘 다 삶의 궤적이 결코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영화는 보는 것, 듣는 것과 생각하게 하는 모든 것이 재미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역사와 당시 천재 과학자들의 명성을 조금만 알고 있어도 그 재미를 곱절로 즐기 수 있다. 책은 시의 철저한 재해석을 담은 내용이다 보니 상당히 어렵다. 싯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사상과 고전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부담도 있었다.


그들의 세세한 삶을 단순한 연표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광기가 넘쳐나던 시대가 만든 불행을 예상하고 순응한 삶 또한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극중 아인슈타인의 대사(나무위키 참조)와 "청포도"의 싯구가 그들과 세상을 나타내는 절묘한 표현으로 보인다.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의 대사 


"이제 자네 차례라네. 자네가 이룬 성취의 결과에 대한 대가에 직면해야 하는 거지. 세상이 자네를 충분히 고통스럽게 벌하고 나면, 언젠가 이 세상은 자네를 불러 성대한 연회를 개최할 걸세."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구절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한 개인이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멸망으로 몰고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세상이 협잡하고 겁박하여 한 인간을 파멸로 몰아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너무 쉽게 자행되곤 한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은 불의가 충만한 세상과 마주하며 지키고자 했던 신념은 분명 갖고 있었고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을 것이며, 인간으로 느끼는 고통과 번민은 당사자가 아니면 형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육사 시인이 일제의 모진 고문을 견뎌내고 살아서 광복을 맞이했다면, 오펜하이머와 같은 의혹과 추궁에서 자유로웠을까? 끝내 그들은 견뎌냈고 버티었으나 세상이 달가워 하지 않았다. 이육사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시,  『 광야 (曠野) 』 를 옮기며, 그들이 지켜낸 세상이 그들을 어찌 기억하고 지켜낼 수 있는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 겠다.





광야 (曠野)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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