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무라비 법전은 모든 상업 행위가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계약 문서와 증인의 존재가 필수임을 명시한다. 이는 고대 근동 경제가 기록 기반 계약 사회로 이행했음을 상징하는 제도적 정점이다.
함무라비 법전은 문서 없는 거래에 대해 법적 보호를 부정하거나 제한한다.
문서 작성은 전문 서기관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들은 공인된 계약 기록자로서 사회적·법적 신분을 갖는다.
점토판에 기입되는 주요 정보: 당사자 이름, 대출·거래 내용, 기한, 이자율, 담보, 증인 목록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서기관이 단순 기록자가 아닌, 법적 중개인 및 계약의 공증자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법전 제7조, 제122조 등은 증인 없이 체결된 거래를 불인정하거나 분쟁 시 무효화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거래 당사자가 거래 내용을 입증할 문서나 증인을 제시하지 못하면, 소유권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사적 계약도 공적 기록 없이는 법적으로 효력을 갖지 못함을 분명히 한다.
즉, 메소포타미아의 상업은 이미 ‘문서화된 거래만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근대적 원칙의 초기 형태를 갖고 있었다.
법전은 단순한 대출 외에도 다양한 상업 행위에 대한 문서 체계를 명문화한다:
위탁판매 계약: 상품을 위탁받은 대리인은 판매 후 금전으로 정산하고, 이를 영수증으로 증명해야 함
수취 문서: 지급 완료의 증거로 사용되며, 이 문서가 없으면 채무는 소멸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됨
대리 계약: 거래 대리인은 사후 결과를 기록으로 보고해야 하며, 미보고 시 사기죄로 처벌 가능
이는 복합적 계약 관계의 법적 책임 구도가 정교하게 확립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문서 체계가 법적 효력을 가지게 되면서, 위조와 조작은 심각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거짓 문서를 이용해 타인의 재산을 요구할 경우, 재산 몰수 또는 사형까지 가능
서기관이 계약 내용을 조작하거나, 증인 없이 문서를 작성할 경우 형사 처벌 대상
법전 제8조, 제9조 등은 위조·사기의 유형을 매우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이는 공문서의 법적 신성성과 공신력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문서는 보통 사원 또는 왕궁 내의 공적 기록 보관소에 저장되었으며,
분쟁 발생 시 이전의 계약 문서가 증거자료로 제출되었다.
이는 고대 경제가 계약을 통한 반복 거래를 가능케 하는 장기 신용 체계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함무라비 법전은 단순히 경제 활동을 규제한 것이 아니라, 거래와 계약을 기록하고 검증하는 문서 시스템을 법적으로 강제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다. 문서 없는 거래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으며, 계약은 반드시 서기관, 증인, 기록보관소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사회적으로 승인되어야만 효력을 가진다. 이는 계약의 형식성과 문서화된 법률 문화의 기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