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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Nov 16. 2021

엄마를 용서할 수 있을까

자식보다 돈과 자존심이 더 중요한 엄마

    “부모님이 얼마나 더 사시겠니?” 내 나이 삼십 대 중반일 때부터 이 말을 종종 들었다. 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몇 가지 말 중 하나다. 

    나는 청소년기에도 반항이라는 것을 해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엄마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공포로 사람을 위압하는 기술이 있다. 적어도 나와 동생들에게는 그랬다.  

    “엄마가 얼마나 더 사시겠니? 엄마에게 사과해라.” 난생처음 엄마에게 대들었을 때 아빠가 하신 말씀이다. 엄마의 기세에 눌려 나의 의견 한 번 제대로 말해보지 못했던 내가 처음으로 엄마에게 대든 것은 내 인생 전반기 최고의 사건이었다. 건강한 부모라면 이런 딸의 모습을 환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독립기념일이라 할 만하다. 

     

    사연은 이랬다. 결혼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우리가 집을 팔고 사는 상황이었는데 이사 날짜를 조정하는 일로 상대방과 타협이 잘 안 되었다. 당시 나는 엄마에게 나의 일상사를 미주알고주알 아뢰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엄마는 딸에게 벌어지는 일을 샅샅이 아는 것이 엄마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나의 일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도 자신이 제시해준다는 데 있었다. 그때 엄마가 제시한 해결책은 어이없게도 내 남편에게 떠넘기라는 것이었다. “저는 잘 모르겠으니 남편과 상의해 주시죠.”라는 식으로 말하라고 토씨 하나까지 알려주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쳤다. 그래서 엄마에게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그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말이 아니라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이 모두 놀랐다. 나도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으니까. 나는 단지 “그렇게는 못 하겠어요! 나 혼자 계약했고 의논도 내가 했는데 왜 남편을 끌어들여야 해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나는 혼자 집을 거래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나 혼자서는 옷 한 벌 사지 못했던 못난이가 수천만 원짜리 집을 거래했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나는 나의 모험을 엄마가 응원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이 어려운 거래를 네가 성사시켰으니 날짜 조정은 얼마든지 상대방과 타협하여 잘 할 수 있을 거다.”라는 말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엄마는 그 일은 어려우니 남편에게 떠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런 타협은 약간의 응원만 있어도, 아니 응원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내가 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내가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나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태도가 너무 싫었다. 나에게 곤란한 상황이라면 왜 사위에게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비겁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치는 엄마가 너무 부끄러웠다. 

    엄마는 나의 반응이 너무 뜻밖이어서인지 즉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집에 돌아오고 며칠째 전화 한 번 하지 않자 아빠가 전화하셨다. 엄마한테 반항하고 소리 지른 것을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사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빠는 또 전화하셔서는 애원을 하셨다. 엄마가 노발대발하고 있으니 제발 와서 용서를 빌라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냉전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그 일에 대해 사죄도, 용서도, 화해도 없었다. 사과받을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한 것 같다. 처음으로 엄마를 상대로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무의식 속에는 반감이 있었을 테지만 엄청난 두려움이 반감을 누르고 있었다. 그 사건을 기화로 더이상 보호를 빙자한 엄마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니 보호도 사양하기로 했다. 서른이 넘은 나, 아이를 둘이나 낳은 나는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때 그 사건에 비견할 만한 일이 최근 일어났다. 내가 ‘엄마는 돈을 아낀다’라는 금기어를 발음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나에게 용돈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군것질거리를 사지 못했다. 친구들이 라면을 사서 먹으면 따라가서 얻어먹고, 떡볶이를 먹자면 따라가서 먹었다. 나는 자기 용돈으로 간식을 사서 먹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사주기도 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대학 다닐 땐 점심값 정도는 갖고 다녔던 것 같다. 나도 아르바이트를 했으니까 내가 번 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옷이나 신발, 또는 가방을 사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돈이 없기도 했지만 너는 옷을 살 줄 모른다, 또는 옷은 엄마가 사주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엄마 취향대로 옷을 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내 옷 취향이라는 것이 없었다.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은 엄마가 가장 잘 알았다. 결혼 후에도 내 옷과 남편 옷을 엄마가 사다 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돈은 받아 갔으니까. 백화점에서 사면 얼마인 옷을 남대문이나 동대문시장에서 턱없이 싼 가격에 사다 주며 엄마는 공치사했다. 엄마 덕에 좋은 옷을 싸게 산 줄 알라고.

    그래서 옷을 고르는 나의 능력은 생기기도 전에 퇴화해버렸다. 나는 지금도 옷을 고르는 안목이 없어서 무조건 저렴한 것을 고르고 본다. 실패해도 크게 손해 보지는 않을 테니까. 내 둘째 딸은 중학교 다닐 때부터 내가 옷을 사주는 것을 거부했다. 자기 옷도 못 고르는 엄마가 딸 옷을 고르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엄마 어깨가 더 나빠져서 재봉질을 못 하게 되어 우울해하신다는 말을 이모에게 듣고 전동식 재봉틀을 알아보았다. 중고시장에는 십만 원 대의 가격으로 가정용 전동재봉틀이 나와 있었다. 필요 없다고 하는 엄마를 설득하여 중고 재봉틀 하나를 사드렸다. 엄마는 싸다고 하면 설득되기 때문에 30만 원짜리를 삼 분의 일 가격에 사는 거라고 허풍을 쳤다. 

    외출한 김에 내 주거래은행인 W 은행에 갔다. 아빠 통장을 해지하면서 그 통장으로 보내드리던 용돈 10만 원을 엄마 통장으로 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의 입출금명세를 조회해보니 10월 26일에 아빠 통장으로 돈이 빠져나간 기록이 있었다. 분명 10월 초에 아빠 통장을 없앴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일을 처리하였기에 좀 피곤했지만, 은행에 가려고 또 나오고 싶지는 않았기에 다시 아빠의 주거래은행인 K 은행으로 갔다. 엄마는 아빠 통장 해지할 때 동생을 불렀던 일을 회상하면서 동생을 또 부르라고 하면 어쩔 것이냐며 돈 십만 원 찾자고 이 짓을 해야 하느냐고 했다. 평소 돈 만 원도 아까워서 쓰지 않는 양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고 했더니 엄마는 그때부터 입을 딱 다물었다. 돈을 아낀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거였다. 아마도 10만 원을 엄마 통장으로 넣어달라고 할 때부터 자존심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K 은행에서는 아빠의 통장이 말소된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산상 착오로 그랬을 수 있지만 아마 다시 들어왔을 거라고 확인해보라고 했다. 아빠 통장이 없어진 것을 확인해서 마음이 놓였다.     

    집에 도착해서도 엄마는 말이 없었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재봉틀을 앉은뱅이 책상 위에 올려드리고 돌아가려는데 엄마가 나보고 좀 앉아보라고 했다. 당신더러 돈을 아낀다고 말해서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었다. 사과를 바라는 말씀이었지만 나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 정도 말을 가지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보면 엄마는 마음이 너무 쉽게 상하는 사람이니 성격을 좀 바꾸시라고 했다. 엄마가 돈을 아끼는 것은 사실이지 않느냐, 그리고 엄마가 알뜰하게 아끼고 살아서 우리 집안이 이만큼 살게 되었으니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엄마가 돈을 아낀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니까 내 말에 그렇게 감정이 상하는 것이다, 라고 했더니 자기를 가르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돈을 아껴서 네가 손해 본 것 있냐고.   

    그 말에 대답하자면 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엄마가 돈을 주지 않아서 내가 얼마나 비굴하게 살았는지, 내가 받은 월급에서 용돈을 받을 때조차 당당할 수 없었던 것이 얼마나 갑갑했는지, 결혼한 후에도 나의 통장 잔고를 체크하고 미주알고주알 간섭했을 때 그것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나는 얼마나 비참했는지, 내가 산 것을 보면 뭐든 잘못 샀다고 타박하는 바람에 어떻게 구매 불안증이 생겼는지를 어찌 한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결혼 전에 나 스스로 예산을 세워 살아본 적이 없으므로 남편의 월급 한도 내에서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갈지를 몰라서 남편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다.   

    특히 부모님이 대전에 내려오신 후에는 외식을 하면 우리가 지불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시하는 것도 나는 싫었다. 부모님께 손님이 와도 내가 밥을 샀다. 동생이나 조카들이 와도 밥을 사는 사람은 우리였다. 엄마는 당신이 낸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음식 값이 비싸니 싸니 맛이 있느니 없느니 평가는 잘도 내렸다. 

    돈을 아끼려고 아빠를 그 먼 보훈병원에 입원시키고, 싼 요양병원을 찾으면 좋아서 입이 함박만 해지고, 재가 간병인을 쓰자는 말에 그토록 반대하면서 힘들다는 말은 자제하지 않고. 마지막 넉 달은 아빠 스스로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게 하고. 결국 콧줄과 소변줄을 꽂는 신세가 되어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면서 아빠의 빈소에 꽃장식을 초라하게 했다고 불평하는 엄마를 보면서 그 이중성에 치가 떨렸다. 남들이 보는 데서는 넉넉한 척하고 안 보는 데서는 온갖 궁상을 다 떠는 엄마였다. 그러면서 돈을 아낀다는 말은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중인격자.     

    내가 사과하지 않자 엄마는 재봉틀 사주는 것보다 엄마 어깨 한 번 주물러주는 것이 더 좋다며 서럽게 울먹였다. 우리가 언제부터 어깨 주물러주는 사이였다고 엄마는 그런 것을 바라는가? 엄마는 언제 할머니에게 어깨를 주물러 준 적이 있다고 나에게 그런 것을 바라는가? 내가 엄마라면 어깨는 사람을 불러서 주무르라고 하고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도록 재봉틀을 사주어서 고맙다고 할 것이다.

    엄마는 또 내가 당신더러 우리 집에 오시는 것 반갑지 않다고 한 말도 언급했다. 나는 엄마가 우리 집에 와서 자꾸 일하는 것이 싫었고, 그러다 나의 생활 구석구석을 알게 되는 것도 싫었다. 엄마는 자기 멋대로 판단해서 우리 집에 많이 있는 것은 엄마가 좀 가져가고 엄마 집에 있는 것도 우리 집에 갖다 주셨다. 엄마에겐 그것이 돈 안 드는 즐거움이고 취미생활인 줄 알지만 엄마를 위해 나의 사생활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가 딸네 집에 가지도 못하느냐는 엄마를 보고 나는 나를 딸이 아니라 이웃으로 생각해달라고 했다. 나이 육십이면 이제 딸 취급하지 말고 이웃 사람으로 대해달라고 했다. 그래야 우리가 한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 수 있다고. 엄마는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아빠가 건강하실 때 부모님은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걸 좋아하셨다. 변화를 추구하시는 두 분이 돈 안 드는 여행지로 우리 집을 택하시는 것이다.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오셨고 오실 때마다 기본 삼박사일 지내다 가셨다. 엄마는 음식솜씨로, 아빠는 기술로 도와주실 일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주부 초년생일 때는 두 분의 방문이 반가웠다. 두 분이 오시는 명분도 늘 ‘소라를 도와주러’ 오는 것이었다.

    두 분이 도착하는 즉시 엄마는 보따리에서 반찬거리를 풀어놓고 아빠는 집의 곳곳을 조사하기 시작하셨다. 손 볼 곳이 있나 찾으시는 것이다. 두 분은 끊임 없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도착하는 즉시 절간 같은 우리 집은 사람 소리로 가득 찼다. 나에게도 계속 질문하고 지시하시기 때문에 나 또한 그 부산함의 일부가 되었다. 결혼 초에는 그런 부산함이 사람 사는 자연스런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크고 내 살림 솜씨가 그럭저럭 늘면서 두 분이 오시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가르침과 지시는 내가 무능한 인간임을 일일이 확인시켰고, 두 분의 청력의 맞추어 최대로 맞추어진 텔레비전 소리는 차분히 생각하는 것을 방해했다. 말 그대로 두 분이 우리 집을 점령하고 우리 식구들을 지배했다. 

    아빠가 편찮아져서 대전에 오신 후에는 거의 매일 우리 집에 놀러 오셨지만, 당신들의 집이 옆에 있으니 주무시고 가지 않는 것은 좋은 점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심심하면 우리 집에 오셔서 쌓인 설거지를 하거나 밀린 다림질을 해놓고 가셨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엄마 스스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엄마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라 생각하여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제는 엄마 팔이 고장 나서 당신의 집안일도 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일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고 결국 그 말은 우리 집에 오시지 말라는 말로 발전한 것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딸에게 말했더니 “이웃이라고 하지 말고 사위 집이라고 하지 그랬어.”라고 했다. 그렇게 말했으면 충격이 덜했을까?    


    엄마는 지난 주말 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5일째 서울에 머물고 있다. 동생 집과 이모들 집을 전전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려오시면 엄마에게 오래 묵혔던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어찌어찌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엄마의 반응에 어떻게 대처할까? 이제는 엄마가 격노해도 두렵지 않지만, 연민을 자아내는 반응을 보이면 어떻게 하나? 평생 한 번도 미안하다고 말해 본 적이 없는 엄마에게서 사과의 말을 듣지 못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엄마를 미워하는 이유는 한둘이 아니지만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모순된 엄마의 이중성이 가장 싫었다. 동생이 한국에서 적응 못 해서 미국으로 가기 직전, 이상심리 징후가 보였다. 동생은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벽에다 머리를 찧으며 자해를 했다(고 올케가 말해주었다). 나는 당시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상담전문가를 만나며 동생의 일을 상의했다. 그분들은 치료와 상담을 권했지만, 동생은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가족 상담을 받자고 부탁했다. 그때 엄마의 대답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상담을 받으면 뭐라고 하겠노? 내보고 변하라고 안 하겠나? 나는 못한다.”

    20년 전이었다. 60대인 엄마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특히 가족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다. 나는 엄마가 무서운 것을 넘어 혐오감을 느꼈지만, 엄마에게 대항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자식을 살리는 것보다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때는 동생이 이 지경까지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나인 내가 그토록 절실하게 동생을 치료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거린 것에 비해 너무나 냉담한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했다. 동생은 미국으로 도피했고, 그 후로도 다시 한국으로 왔다가 미국으로 갔다가를 반복하며 삶에서 도피했다. 동생의 문제는 단순히 환경을 바꾸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내면이 극히 불안하다 보니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고 의지할 사람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종교단체의 리더에게 의존하더니 지금은 오로지 자기 아내에게 의존하며 살고 있다. 동생의 불안과 의존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원인이 엄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애착손상임을 엄마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인정하지 않으면 사실이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부정의 기제를 엄마는 전매특허로 사용한다. 

    엄마는 나를 자신의 심리치료자로 초대한 적이 없으므로 엄마를 치료할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나의 실망과 분노는 표현해야겠다. 자식이 미쳐가는 데 엄마로서 목숨이라도 바쳤어야 한다고. 나는 그런 사람을 엄마로 둔 것이 너무 분하고 그런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이렇게 나는 엄마가 얼마 못 살 것 같아서, 또는 말해봤자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리고 때가 아닌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하고 싶은 말은 늘어만 갔다. 이제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엄마가 듣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준 적이 없었고, 자식의 자존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으며, 자식을 그토록 힘들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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