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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r 02. 2023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

육아를 졸업하는 시점에서 읽은 「허공 한 줌」

    3월이다. 막내는 오늘 대학생으로서 첫 수업을 받는 날이다. 19년 전 내가 개인 사무실을 오픈하던 날, 아이는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해 그달에 큰아이는 재수를 시작했고, 둘째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4월 남편은 세 딸의 아빠가 되었다.   

    막내를 기숙사에 보내고 나니 많이 허전했다. 어제는 남편까지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 집에는 나 혼자였다. 철저히 혼자가 된 느낌이라고 하면 과장일 터이지만, 처음 엄마가 된 후 38년 만에 아이들이 모두 둥지를 떠난 셈이니 마음이 허전하지 않으면 이상한 것이다. 

    나를 닮아 무심한 막내는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연락이 없고, 문자 메시지로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만 대답한다. 원래 감정 표현이 없는 아이라 그렇지 아이 스스로는 외로움과 슬픔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이의 무심함이 서운했다가, 엄마로서 잘못한 일만 생각나 미안했다가, 사랑하는 모녀간이라면 관계가 이렇게 소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참해진다. 그러나 19년간 내가 뿌린 만큼을 거두어들이는 셈이니 나는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    

    나는 언제나 아내와 엄마로서보다는 나 자신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온전히 아이들에게 몰입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속을 끓이기는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타인이었다는 자책감이 몰려온다.  


    신형철이 『인생의 역사』에서 나희덕의 시 「허공 한 줌」을 소개하며 달아놓은 해설에 크게 공감했다. 이 시는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난간 위에 올라간 아이가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엄마는 있는 힘껏 아이를 향해 팔을 휘두르지만, 허공만 움켜쥔 후 완전히 정신이 나간다. 다행히 아이는 안쪽으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 진짜로 죽어버린다. 아이가 안전한지 알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지만 이제 아이 걱정이 사라졌으니 죽어도 되었던 것이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이런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자식이 난간 위에 있을 때 그 아이를 살릴 수 있고 또 살려야 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부모는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부모가 아이를 받아낼 순 없으리라. 더 나아가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라면? 제 몫으로 주어진 굴러떨어짐을 감당함으로써만 아이가 살아날/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는 자주 허공을 움켜쥐며 자책할 것이다. 그 허공을 허공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 이제 그가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그 사랑을 부드럽게 내려놓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 지극한 사랑의 이야기에서, 그 사랑의 배후와 근저에 있는 강력한 ‘움켜쥠(執)’의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성숙한 거리를 두는 일의 깊이를 생각했을 것이다,”

    신형철이 이 해설을 쓸 때 그의 곁에는 아홉 달 된 아들이 있다. 그는 새를 쥐듯 조심하며 아이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심하다’에서 操라는 한자어는 상형문자로서의 기원에 비추어볼 때 손으로 나무 위에 있는 새를 잡는 모양을 따른 글자라는 설이 있다. 그 설에 근거하여 신형철은 ‘조심’을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라고 풀이한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새처럼 다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하면서, ‘아이가 나를 필요하다고 느끼는 마지막 날까지 나는 살아 있어야’ 하므로 부모는 자기 자신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라고.     

더 이상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의 슬픔

    아이들과의 거리두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는 유난히 거리 조절을 어려워하는 엄마였다. 아이에게 푹 빠져있지 않으면 삐쳐서 아이에게 등을 돌리거나 했다. 적당한 거리에서 아이를 믿고 바라봐주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지금도 아이에게 몰입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다가, 아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견하고 섬찟해 하곤 한다. 

    새를 손으로 쥐듯 아이를 대하라는 것은 육아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상징이다. 한 친구가 내게 말하길, 이제 아이가 대학에 갔으니 “육아 졸업”이라고 했다. 육아는 졸업했을지 모르나 재정적, 정신적 후원자 역할은 여전히 남아있다. 아이는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니, 내가 아이를 통제할 소지는 얼마든지 남아있다. 그러지 않도록 나 자신을 통제해야겠다. 나 자신으로부터 아이를 지켜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나는 죽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내가 우울한 이유는, 내가 더 이상 아이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지금이기 때문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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