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아이에게 매혹되기 전에 그 아이의 방에 매혹되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졸업반일 때 처음 만났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 그 아이에게 나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때까지 나의 인간관계란 매우 수동적인 것이어서 상대가 나에게 다가오면 반응하는 식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었고 나의 정신적 세계는 신앙이 채우고 있었다. 그 신앙에는 초월적 존재와 나와의 관계만 있었지 신이 사랑하는 다른 인간에 대한 사랑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관계 맺는 기술이 평균 이하였다.
우리는 짝이었지만 서로를 목석 대하듯 했다. 그러다 우리가 한동네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고, 버스를 같이 타고 내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우리는 서로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말이라기보다 꼭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정도였다. 하루 중 12시간 이상 같은 공간에 있으니 말을 아주 안 하는 것도 이상했다.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그 아이는 독서실에 간다고 했다. 나는 그때 독서실이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공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 아이를 따라 처음 간 독서실에서 어떤 아이가 번데기를 나누어 주었는데, 다들 잘 먹는 그 곤충의 허물을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신기한 곳이었지만 공부가 잘 되는 장소는 전혀 아니었다.
독서실에 흥미를 잃은 나를 보고 그 아이는 자기 집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호기심이 다시 발동하여 따라간 그 애의 집은 그 아이만큼이나 낯설었다. 세 남매는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방은 각자의 개성에 따라 꾸며져 있었다. J의 방에는 침대와 책상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침대 옆 벽에는 J가 그린 그림이 걸려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그 공간을 그토록 낯설게 만든 요소 중 하나는 유화물감 냄새였던 것 같다.
할머니와 밥하는 언니가 기거하는 방까지 방은 모두 네 개였고 그 방들에 둘러싸인 대청마루에는 의대에 다니는 오빠가 그렸다는 대형 그림액자가 걸려 있었다. 마당에는 남동생의 것이라는 커다란 천체망원경이 있었다. J의 집은 기능 중심의 우리 집과는 완전히 다른, 미학적 공간이었다. 우리 집도 세 남매가 각자의 방에서 기거했지만, 그저 기거할 뿐 우리의 방은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전근이 잦은 아버지의 직업상 부모님과 막내 동생이 타지에 있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 우리 집 식구는 밥하는 언니까지 달랑 셋이었다. 방은 네 개였는데 누구의 방이라 할 것도 없이 모든 방이 공용 공간이었다. 아무나 아무 방이나 들락거렸고 가구나 침구를 배치할 권리는 오로지 부모님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 방들의 인테리어는 벽을 따라 이불장과 옷장, 책상이 배치되었을 뿐,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매혹되기 전에 그 아이의 방에 먼저 매혹되었던 거다. 처음 그 애의 집에 간 날 우리는 공부는 뒷전이고 수다만 떨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애가 나에게 시를 낭송해주었던 것은 기억난다. 시를 국어책에서 읽고 이해하고 분석했을 뿐 그것을 즐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시를 노래처럼 부르는 친구가 신기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하고 동틀 녘에야 잠든 우리는 등교 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 없었다. 나란히 지각한 우리 두 사람에게 선생님은 운동장을 청소하라는 벌을 내렸다. 학교 운동장이었다. 우리 집 마당도 쓸어보지 않았던 내가 넓디넓은 운동장을 쓸다니! 우리는 깔깔대고 웃으며 운동장 바닥에 싸리비 자국만 냈다. 그날 이후에도 우리는 수업 시간에 소근대다가 선생님에게 지적당하기 일쑤였다. 참다못한 담임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우리의 자리를 떼어놓은 것이다. 나는 맨 앞자리, J는 맨 뒷자리였다. 그런다고 우리의 우정이 식지는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았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청주에 살고 아이들만 서울로 유학 보낸 것이라 그 집에는 할머니 외에는 어른이 없었고 우리 부모님도 아버지의 발령지인 진해에 있었다. 어른이 없는 집에 사는 우리들은 마음껏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나는 J의 예술적인 세계가 신기했고 J는 내가 공부도 안 하면서 성적이 좋은 것이 신기했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이 서울로 복귀한 후에는 우리의 밀월시대가 끝났다. 엄마는 J를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엄마는 내 친구 중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고 내가 누구를 좋아할수록 엄마는 그를 더 싫어했다. 엄마 눈치를 보아야 하니 더 이상 두 집을 오가며 노는 것은 어려워졌다. 다만 방학 때 그 아이의 청주 집에 놀러 가는 것은 허락되었다. J의 청주 집은 그 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산부인과 병원 2층에 있었다. 나는 그 집도 좋았다. 그 집에는 고가구들이 다소곳이 놓여있었고 그 애의 어머니가 그린 수묵화도 있었다. 그 애의 집은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우리 집은 음악을 사랑하는 집이었지 미술을 숭상하는 집은 아니었기에 옷에 대한 엄마의 집착을 제외하면 보이는 아름다움에는 별 관심이 없는 집안이었다.
낯선 도시의 낯선 집으로의 여행은 자유의 감각에 눈뜨게 해주었다. 청주는 나에게 꿈의 도시가 되었다. J의 집이 있는 그 도시에 가면 언제나 환영받았기 때문이다. J의 어머니는 우리 엄마와 달랐다. 우리 엄마는 내 친구들을 동네 강아지처럼 취급했다. 누가 왔는지 갔는지 관심도 없었고, 내 친구를 위해 뭔가를 내주는 법도 없었다. J의 어머니가 제공했던 정갈한 음식과 정중한 대우 덕분에 나는 예의와 품격을 갖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재작년 그분이 돌아가신 후 J는 어머니가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사람을 불러 어머니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J 부모님의 원래 고향은 청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가 청주에 남은 부모님의 흔적을 다 지워 없애는 모습이 나는 슬펐다. 나에게 청주는 나와 J의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울 메이트 영화 포스터
<소울 메이트>라는 영화의 예고편에 끌려서 나는 그 영화를 보러 갔다. 미소 역을 맡은 김다미가 “우리가 왜 이렇게 된 거니?”라고 말하는 장면에 내 시선이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40대 때까지는 J와 내가 소울 메이트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우리 사이가 소원하다.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처음 만난 날로부터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래된 관계이기 때문에 소원해졌다는 건 잘못된 말이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홍콩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었다. 이 영화를 보러 굳이 한 시간이나 걸리는 구도심까지 간 것은 김다미의 질문이 내가 J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도 그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 우리의 심리적 거리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와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싶었다. 어쩌면 영화가 내 마음이 걸어온 길을 보여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3살에 처음 만난 두 친구 미소와 하은은 가정환경도 성격도 너무 달랐지만, 그래서 더욱 빨리 친해졌다. 둘은 뭐든 함께 하는 소울 메이트가 되었다. 미소는 하은이 처음으로 귀를 뚫을 때 옆에 있어 주었고, 하은은 진우라는 남자아이와 사귀고 싶다는 마음을 미소에게 처음으로 털어놓는다. 소울 메이트는 첫 경험을 공유하는 존재인 것일까? 하은을 너무 사랑하는 미소는 하은의 마음을 뺏은 남자아이가 하은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되어 둘의 관계에 간섭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 남자아이의 마음이 미소에게 향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미소는 하은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하은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학교까지 중퇴하고 음악 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서울로 간 미소는 남자친구에게 배신당하고 혼자만의 삶을 이어간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교육대학에 진학한 하은은 편지로만 미소의 소식을 듣는다. 미소는 어릴 때 꿈꾸었던 대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에 간다고 편지에 썼지만, 사실 미소는 산동네 끝 집에 살며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은은 의사가 된 진우와 결혼할 예정으로 동거를 시작하지만, 결혼식 당일 식장을 박차고 뛰어나온다. 자신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진우에게 실망한 마음을 묻어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직장을 그만두고 어릴 때 꿈꾸었던 화가의 길을 다시 가고 싶다는 하은에게 이렇게 말한다. “진짜처럼 그리는 건 재주지 재능이 아니야.”라고. 하은의 꿈을 이해하는 사람은 미소밖에 없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고향 제주도를 떠나지 못했던 하은은 미소의 용기를 떠올리며 비행기를 탄다. 그리고 미소가 살았던 산꼭대기 집에서 살며 그림을 그린다. 임신 중이었던 하은에게 산통이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미소를 찾아오고, 미소는 하은의 보호자로 친구의 출산에 함께 한다. 그러나 하은은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미소는 하은의 딸에게 자기 성을 붙여 안하은이라는 이름으로 키운다. 뒤늦게 찾아온 진우에게 미소는 어린 하은이 그의 딸이라는 것을 밝히지만 엄마인 하은의 죽음은 숨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하은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로 가서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장면이다. 미소의 영혼이 하은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었고, 자유로워진 하은이 남긴 유산인 어린 하은을 위해 미소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다. 너무 사랑해서 똑같이 닮고 싶었던 두 사람의 영혼이 점점 비슷해져서 결국은 구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은의 영혼이 걷던 얼어붙은 바이칼 호
임신 중이었던 하은이 그리기 시작한 미소의 초상을 미소 자신이 완성하여 미술 공모전에 내고, 이 작품이 입상을 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미소의 얼굴이다. 극사실주의 기법의 이 그림을 미소가 완성했다는 것은 미소의 영혼도 하은을 닮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은이 처음에 진우를 사귀고 싶어 한 이유는 그의 눈을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보면 그 사람에 대한 자기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은은 말했다. 자신이 그린 진우의 얼굴을 보니 자기가 진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은은 자신이 그린 미소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소를 사랑했는지 절절히 느꼈을 것이다. 하은이 그리던 그림을 완성하면서 미소는 자기 얼굴에서 하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은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J에게 영화 본 이야기를 했다. “우리도 한때는 소울 메이트였지.”라는 나의 말에 J는 “나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데?”라고 답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너도 <소울 메이트> 한 번 봐.” 하고 말았다. J가 나보고 아직 그런 유치한 감성을 못 버렸냐고 할까 두려워 오래 주저하다가 보낸 톡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J에게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를 길게 써서 들려주고 싶어졌다. J에게 내가 유일한 친구가 아니듯, 나에게도 J가 유일한 친구는 아니다. 세상에 소울 메이트가 한 명만 있으라는 법도 없다. 그 시절 우리는 분명 소울 메이트였다. 아마도 세월에 맞서며 생긴 비늘로 가끔 서로를 찔렀기에 우리가 소원하게 된 것이리라. 친구는 여전히 나를 소울 메이트로 생각한다니 고마웠다. 노년의 초입에 선 지금 과거 일은 다 털어버리고 다시 J와 즐겁게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