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인> 후기
『다가오는 말들』에서 은유 작가는 “악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고통당하고 있다면 그건 구조의 문제”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 동시에 구조적 악이 개인의 악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회가 벌하지 않는다 해서 양심을 억누르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구조적 악은 개인의 악을 방조 또는 조장한다. 고통 당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행위를 ‘죄’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악한 사회는 개인을 악에 둔감하게 만들고, 악에 둔감한 개인은 사회를 악하게 만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악한 사회를 두고 보는 사람들은 사회의 악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같은 책에서 작가는 “공동체의 무신경함 때문에 그 구성원들은 성 착취 산업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성 착취 문화의 당사자가 된다”고 썼다. 같은 맥락이다.
드라마 <인연>의 지난 회차에서 도망 포로로 오인되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주인공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장면이 나왔다. 그녀가 오랑캐에게 성폭행을 당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설혹 그랬다 하더라도 그 사건에 그녀의 책임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버린 다른 여성들과 비교하면서 여주인공을 뻔뻔한 환향년(還鄕女)이라고 욕한다.
여주인공은 자신을 속환시키러 왔다가 자신이 오랑캐에게 팔려 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간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그에게 당당하게 말한다. “내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것에는 내 책임이 전혀 없으므로 당신에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장현 나리(오래전부터 여주인공을 사랑했고 위기의 순간에 그녀를 살리려다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에게 마음을 준 것은 미안합니다. 그러니 당신과 이혼하겠습니다.”라고.
여주인공의 아름다움과 기품에 반하여 그녀와 결혼했던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정조를 잃었을 거라는 생각에 그녀를 구출하려는 노력을 바로 중단하고 돌아와 다른 여인을 첩으로 들여 임신시켜 놓은 상태였다.
남편 입장에서 정절을 잃은 아내는 죽은 아내보다 못했다. 차라리 시신으로 돌아왔으면 아내의 명예와 남편의 명예가 다 지켜졌을 것이다. 생명보다 절개가 중요했던 그 시대에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 여주인공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사이다 같은 시원함을 안겨 줄지언정 당시로서는 존재하기 어려운 캐릭터였다. 오죽하면 지금까지도 화냥년이란 말이 통용되겠는가.
임금이 무능하여 국가의 주권을 잃고, 백성을 포로로 잡혀가게 놔두고, 포로가 당하는 수모는 온전히 당사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부조리한 시대였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무능한 왕에게 충성하면서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려는 의병들과 선비들이 등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인 왕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사실 백성의 안녕을 지켜주지 못한 왕이라면 하야했어야 옳은데 말이다.
오히려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는 조선 포로들의 실상을 알고 마음 아파한다. 자신도 포로 신세가 되어보니 약자들의 아픔이 보였던 것이다. 반면 구중궁궐에서 문무대신들의 보호를 받고 있던 왕은 백성의 아픔을 체감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당시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세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죄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자신만은 그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부조리한 세상이다. 나는 이스라엘 국민이나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북한이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우리는 산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고 그로 인해 내 가슴이 아파지는 것을 허용할 때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