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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pr 15. 2022

보은 또는 용서에 대하여

백온유의 『유원』을 읽고

    이 이야기를 관통하여 흐르는 정서는 죄책감과 분노다. 정말로 미안해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던 한 사람(화재의 원인 제공자인 12층 할아버지)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죄책감과 분노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유원이 여섯 살일 때 화재 사건이 일어났고 열여섯 살이었던 언니는 유원을 이불에 싸서 밖으로 던지고 자신은 질식사한다. 떨어지던 유원을 받은 신 씨 아저씨는 팔과 다리가 으스러져서 장애인이 된다.   

    사건 이후 천진난만하게 자라던 유원은 동네 할아버지의 꾸짖음을 통해 자신처럼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는 미안함과 감사함을 가지고 금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아의 벽 속에 갇혀 산다. 겉으로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중학교 이후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유원의 닫힌 마음을 암시한다. 

    ‘이불 아기’ 사건은 전 국민이 알고 있었고, 특히 그 사건이 벌어진 동네의 주민들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딱하게 여기다가 안도했다가 했기 때문에 유원은 청소년기 대부분을 ‘이불 아기’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즉 ‘살아줘서 고마운 아이’이자 ‘살아있음을 고마워해야 하는 아이’로 살아간다.  

    대체로 이기적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중학교, 고등학교 학우들도 유원에게만은 특별대우를 한다. 그들이 유원을 볼 때 언제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언니 대신 살아난 아이, 행운과 불운을 동시에 타고난 아이, 모종의 마법이 작용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유원은 어느 날부터인가 그런 관심과 배려가 싫어지기 시작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자기는 세상에 빚을 진 아이이므로 잘 커야 하고, 특히 자기를 살리고 장애인이 된 신 씨에게는 평생 은혜를 같으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적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원은 세상의 모든 사람과 거리두기를 시작한다. 친구들과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부모와도 마음의 거리를 둔다. 사실상 가장 멀리하고 싶은 사람은 신 씨였지만 그를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유원의 부모는 신 씨가 자기 딸 살려낸 것을 후회한다고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의 비위를 맞춘다.     

    유원은 점점 허깨비가 되어 간다. 엄마와 아빠의 웃음 속에 웃음이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유원의 삶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없고 해야 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삶이었다. 유원이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혼자 끼니를 때우는 일은 세상의 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옥상은 신 씨의 딸 수현을 만나는 장소가 된다. 

    수현 역시 삶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차적인 동일시 대상인 부모가 자랑스럽지 않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가 어렵다. 수현은 스스로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기로 선택한다. 동년배 아이들의 절대 관심사인 대학입시에 초연한 모습은 의도했든 안 했든 본인과 다른 아이들 사이를 가르는 벽이 되었다. 

    결국 수현에게도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던 것은 유원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옥상에서 만나는 것은 외로운 사람들의 조우를 상징한다.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외로워지고 싶어서 혼자인 사람들. 사람을 피해 찾아간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이 이야기는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을 피해 찾아간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

    유원과 수현이 신 씨를 사이에 두고 상처를 주고받은 관계라는 것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을까? 아니면 ‘그런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까? 소설적 장치로서 수현의 아버지가 유원의 은인이자 착취자 역할을 맡은 것이 이 소설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둘 중에 먼저 서로의 관계를 알고 있던 수현은 유원이 누군지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수현이 커밍아웃을 했다면 유원 쪽에서의 미안함과 적대감 때문에 두 사람이 가까워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수현이라는 인물은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지나치게 쿨하고 어른스러운 캐릭터다. 수현을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반항아로 그릴 수도 있었건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기에 이렇게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다고 가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현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원래 이기적이고 미숙한 사람인 주제에 우연히 ‘이불 아기’를 구하게 되면서 미담의 주인공이 되어 온 국민의 찬사를 받게 된다. 자기 아버지가 원래 이타적인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던 수현은 아버지의 부당한 자부심에 염증을 느낀다. 

    한편 수현에게 유원은 안 그래도 불행한 자신의 가정을 더 불행하게 만든 가해자였다. 자기 죄(사실 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유원 때문에 신 씨가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유원은 죄책감에 시달렸다)의 결과가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 유원을 바라보는 수현의 마음은 어땠을까?     


    신 씨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고, 의인이면서 악인이고, 기버이면서 착취자다. 유원은 살아 있지만 죽어가는 자이고, 고마워해야 하기 때문에 분노하는 자이고, 행복해야 하기기 때문에 점점 더 불행해지는 자이다. 반면에 수현과 정현은 순수한 피해자다. 수현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괴로워했으나 다행히도 그 분노 에너지는 약자들을 지키는 행동으로 전환된다. 

    수현은 유원에게 신 씨를 미워해도 된다는 허락을 해준다. 유원이 신 씨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수현의 허락으로 유원은 죄책감을 벗어버리게 된다. 유원이 자기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순간 신 씨가 죄책감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이러니다. 

    “아저씨, 제가 너무 무거워서 힘드셨죠? 그런데 저는 지금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요.”라는  말은 유원이 신 씨에게 느꼈던 미안함과 거부감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말을 듣고 신 씨가 유원의 가족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된다. 선행이란 보답을 바라지 않고 했을 때 진정한 선행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우연히 한 아이를 살린 것으로 영웅 대접을 받았던 신 씨는 스스로가 의인이라는 정체성에 갇힘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오히려 바래게 하고 있었다.


    유원의 입장에서 수현의 등장은 구원이었다. 수현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유원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한 것과 같은 실수를 한다. 수현을 신 씨 아저씨와 하나로 엮어서 파악하려 한 것이다. 처음에는 수현이 자기에게 미안해해야 한다고(신 씨가 은인임을 내세워 유원의 부모를 협박하고 있었으므로) 생각했던 유원은 수현 역시 피해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자 유원의 세계관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다. 이 균열은 유원이 신 씨 아저씨를 은인이 아닌 착취자로 인정하고 그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도록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수현의 입장에서 유원을 만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사실 수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유원밖에 없었다. 이는 유원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수현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수현이 유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칭송을 받는 만큼 쌓이는 죄를 본인이 대신 갚아야 한다고 느끼며 살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수현은 “우리 아버지는 원래 그런(몰염치한) 인간이었어.”라고 말해줌으로써 유원을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었다. 유원에게 수현의 존재가 구원이었다면 수현에게도 유원의 존재는 구원이었다. 의인인 척하는 신 씨에게 짓눌려 사는 유원에게 진짜로 좋은 일을 할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성숙한 존재는 물론 정현이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서 연기자가 되겠다고 한다. 누나가 아버지를 기피하고 혐오하는 데 비해, 정현은 피할 수 없는 아버지를 끌어안는 방법으로 아버지의 내면에 들어가 보겠다고 하는 것이다.  

    수현처럼 쿨하기도 쉽지 않지만, 정현처럼 순결하기는 더 어렵다. 가장 순결한 자, 가장 순수한 피해자인 정현이 아버지를 단죄하지 않는데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결국 용서란 순수한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용서할 뿐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존재이므로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따위의 말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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