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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y 24. 2022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오래된 미래』독후감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지만,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시기는 60년대부터였다. 어릴 때부터 배경음악처럼 들어왔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구호는 ‘국민소득 몇 달러’라는 구호와 함께 우리가 희망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었다.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자’라는 선전 문구는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데 그때는 대단히 숭고한 이야기로 들렸다. 모두가 허리띠를 동여매고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에 기대어 하루하루 일했건만 번영의 땅에 들어와 보니 이곳에는 은혜로운 자연도, 다정한 이웃도 사라지고 없었다. 경제발전을 통한 번영은 원래의 삶에 육체적, 경제적 자유를 더해주는 것인 줄 알았더니 그 자유의 대가로 자연과의 단절, 가족과 공동체와의 단절을 가져왔다.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하면서 국가와 기업에 봉사하던 우리 아버지들은 요양원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70년대 골목길에서 만난 아이들의 미소는 라다크인들과 닮아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를 읽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잃어버렸다. 자연이 무한히 베풀어주던 색감과 형태감, 소리와 운동감을 지금은 값비싼 미술품과 음악, 춤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자연도, 이웃도 모두 공짜였는데 지금은 돈으로 사야 한다. 자연과의 접촉 없이, 이웃과의 사귐 없이, 외래문화를 우리 것인 양 착각하며 고독한 삶을 사는 우리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도시를 포장한 콘크리트 바닥 대신 맨땅과 풀밭을 밟아보기 위해 우리는 에너지와 자본을 들여 자연 속으로 간다. 갈등의 원천인 가족과 직장 동료들 대신 이유 불문하고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러 쇼핑센터와 레스토랑과 호텔로 간다. 내가 입은 옷이 곧 나이고, 내가 들고 다니는 가방이 곧 나의 가치이기 때문에 명품 할인 행사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자녀가 외국 유명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면 가족이 떨어져 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녀의 유학비용을 대기 위해 기러기와 펭귄이 된 아빠들은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알콜과 벗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60년대와 70년대에는 서민들도 마당 딸린 집에서 살았고 꽃을 심고 동물을 길렀다. 골목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거의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웃집에 놀러 가는 것은 허락받을 필요가 없었다. 담장이 낮아서 이웃집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말소리가 담 너머로도 다 들렸다. 옆집에 가 있으면 밥때가 되어도 엄마는 우리를 찾지 않았다. 아이들은 해가 질 때까지 골목에서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이제는 식물을 길러주는 기계까지 등장하여 흙과 물과 태양을 대신한다. 미래엔 땅이 없어도 식물을 재배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라다크 대학생의 말이 맞았다. 아이들이 친구 사귀는 법을 몰라서 아동 상담실에서는 사회적 기술 훈련을 시킨다. 정부는 사람들에게 이웃을 만들어주려고 마을공동체 사업에 재정을 투자한다. 잠시 마을공동체 활동에 참여해보면서 나의 시간과 자유를 포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내가 자유로이 쓰는 하루보다 돈을 포기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유에 중독되어 있었다.  


    60년을 살며 그토록 갈구해왔던 자유가 겨우 내 손아귀에 들어온 것 같은데, 히말라야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의 웃음이 ‘네가 진짜 원했던 게 그거 맞아?’ 라고 내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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