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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n 10. 2022

소노 아야코와 은희경

2022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만난 두 여인

    충동적으로 결정한 서울행, 나에겐 영감이 필요했다. 처음 만난 국제도서전은 생각보다 소박했지만 몇 권의 책과 좋은 강연을 건졌다. 이 글에서는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던 소노 아야코의 책과 은희경 작가의 대담을 소개한다.


     『나다운 일상을 살다』는 소노 아야코가 86세에 출간한 책이다. 책읽는고양이라는 재미난 이름의 출판사에서 간행했다. 이 책은 시부모님과 친정어머니를 별채에 모시고 살면서 세 분의 임종을 다 지켜본 작가가, 자신의 남편도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도록 돌보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녀는 스스로가 결코 맘씨 고운 간병인은 아니라고 자처하며 자신의 역량만큼 자신의 페이스로 노인들을 모셨다. 

     그녀가 자신의 수고를 덜기 위해 번 돈을 기꺼이 쓰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을 읽으며 우리에게도 이런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부조리한 현상과 싸우려면 지혜와 유연성을 지니고, 상식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외엔 답이 없다.”고 말한다. 세 명의 노인을 혼자 떠안은 것을 부조리한 일이라 생각하며 내내 골내고 살 수도 있었겠으나, 그녀는 “인생에는 운이 있다. 명령받은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 딱히 불평할 게 없다.”고 생각하며 ‘무허가 노인 요양원’을 꾸렸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지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노인 수발할 때의 ‘적당히’란 주로 알아서 쉬어주는 것을 말한다. 나의 영악함은 도망갈 구멍 즉, 오래 지속할 길을 일찌감치 발견한 데 있다. 간병하는 사람은 게으른 편이 좋다.”

    나는 친정 아빠가 아프실 때 주 간병인인 친정 엄마의 비서 역할밖에 안했지만 2년 넘게 골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작가의 지혜가 뼈아프게 다가온다. 

    인간이 죽음을 맞을 때는 지극히 평범한 어느 날 더없이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는 노인들의 마지막을 모두 집에서 모셨다. 일본을 따라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는 언젠가부터 집에서 임종하거나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청결하고 위생적인’ 병원과 장례식장에서 노인을 보내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그러다 근래에 와서는 인간적인 죽음과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시 집에서 임종하는 것의 가능성과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이 ‘완벽한’ 서비스를 해주는 병원을 마다하고 아픈 노인을 집에서 모시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완벽한’ 서비스 안에 ‘인간적인’ 서비스의 함량이 줄어들고 있어서 문제다.

    이 책은 나에게 큰 도전을 던진다. 아빠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아빠를 시설에 보내시라고, 돈을 써서 전문 간병인의 서비스를 받으라고만 주장했던 나는 비겁하게 아빠의 ‘보호자’가 아닌 엄마의 조수로서만 처신했다.        


    드디어 남편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게 된 순간, 작가는 “인간의 숙명으로 한 번은 완전한 패배를 하리라는 걸 예측할 수 있다는 건 결코 나쁘지 않다.”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으로 ‘깊은 수긍과 인정 하에’ 남편을 보내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사망일을 ‘디에스 나탈리스(태어난 날)’라고 부르는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여 장례식에도 즐거운 웃음을 불러들이지만 동시에 그녀는 ‘죽음을 패배로 받아들이는 단계가 없으면 인간의 자만은 끝이 없을 것이고, 아무리 위대한 권력자라도 한 번은 생의 전투에서 지고 말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덧붙여 그녀는 남편이 태평한 시대를 살아서 늘 깨끗한 옷을 입었고 목욕도 하고 싶을 때 했고, 밤 수면을 방해받은 적도 없었기에 세계적 수준의 행복을 누렸다고 말한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상이다. 덧붙여 침상에 누워있을 때도 글과 벗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남편은 행복한 노인이었다고 평한다. 고인이 된 사람이 그만하면 행복했다고 말해주는 것은 남은 사람에게도 마음의 짐을 덜게 해주는 일인 것 같다.

    소노 아야코의 책은 집에 돌아와서 읽은 반면, 은희경 작가의 이야기는 도서전 현장에서 들었다. 시간적으로 순서가 바뀌었지만 은작가의 이야기는 스마트폰 메모로만 남겨놓았던 터라 다시 정리해본다.  

은희경 작가의 토크쇼

    1959년생인 은희경 작가는 외모로도 말투로도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근간인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한 이날 대담의 제목은 <사람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문학의 기능 또는 소용은 ‘사람을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라는 말이었다. 심리학을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심리학이라는 길을 고집하여 살아왔기에 최근에 접하는 문학의 길은 나의 편협함을 깨뜨리는 여행이 되고 있다.

    문학은 유독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사건 안에서 그를 이해하게 되고 독자에게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즉 인간을 보는 방식을 다양화해주고 사람을 읽는 새로운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 소설이라는 말이었다. 문학을 읽는 일이 때로 불편한 이유는 그 속에서 우리가 모르는 것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젊은 시절 자기 이야기를 쓰긴 써야겠는데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르고 있었을 때 작가는 잉게보르크 바흐만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온정주의와 교훈주의를 따르지 않고 글을 쓰기로 했다고 말했다. 바로 그거였다. 있는 그대로의 삶,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리는 것. 지금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논픽션 에세이의 흐름은 비온정주의와 비교훈주의다. 교훈을 주려고 작정하고 쓴 글은 독자들이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단편소설을 쓸 때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를 가까운 사람에게 들려준다는 마음으로 썼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프로도 아마추어도 처음엔 크게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공감했다. 일생의 역작이나 시대의 명작을 남기겠다는 마음 보다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마음으로 쓰면 더 잘 읽히는 글이 될 것이다. 

    이번 소설의 주제인 ‘외로움과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작가는, 사람들은 어차피 모두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완전한 소통을 꿈꾸어서는 안 되고 그저 서로 다름으로 존재하면서 그 다름끼리 연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힘이 빠지는 말이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의 제목인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에서 따온 것으로, 내가 누구를 규정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라는 의미라고 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대한 나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가 맞닿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의 언어는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어서 언어로 사고하는 우리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 불완전한 나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타인의 이해가 맞닿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지막으로 깊이 다가온 말은,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언어를 잘 구사하는 것보다 사유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이 또한 깊이 공감했다. 기억하자. 좋은 글을 만드는 것은 깊은 사유다. 책은 도끼이고 곡괭이인지라 얼어붙고 말라붙은 우리 마음을 깨트리고 갈아엎어준다. 땅을 파고 또 파야 맑은 물줄기를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사유하고 또 사유해서 내 속의 글을 길어 올려야 한다. 


    소노 아야코와 은희경, 현존하는 대작가들의 글과 말을 통해 사유의 우물을 조금 더 파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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