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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11. 2022

모녀의 세계

김지윤의 『모녀의 세계』독후감

    우리 집 고등학생이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해 유성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반납기일이 되어 내가 대신 반납해주었다. 우리가 주로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은 노은도서관인데 여기엔 아이가 원하는 책이 없어서 유성도서관에서 빌렸다. 상호대차서비스라는 것이 있어서 유성구 관내의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은 다른 도서관 책의 대출을 예약할 수도 있고 반납도 가까운 도서관에 하면 되어서 편리하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이는 아직 독후감을 못 썼다며 그중 한 권을 재대출해달라고 했다. 어제는 공공도서관 휴무일이었으로 밖에서 바로 투입할 수 있는 도서 반납기에다 책을 반납했었다. 그러니 오늘 일찍 가면 그 책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9시 정각에 도서관에 갔다. 담당 사서가 출근하자마자 반납기의 책을 꺼내고 유성구 관내 타도서관으로 보낼 책을 따로 분류할 터이니 그전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친정엄마가 빌린 책도 대신 반납해드리겠다고 하고 받아서 갔다. 독서를 좋아하는 엄마도 노은도서관을 애용하시기 때문이다. 

    오늘이 반납기일이라서 안된다고 할까 봐 온라인으로 대출 연장 신청도 해놓았지만, 나의 추리와 노력은 모두 허사였다. 열람실 사서는 반납기에 들어있던 도서를 이미 모두 반납 처리한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책은 물리적으로는 노은도서관에 있으나 소속이 유성도서관이라 지금은 손댈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있나! 재대출을 하려면 유성도서관으로 다시 가야 하는데 사흘 정도 지나야 이 책이 유성도서관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이가 숙제하는데 사흘의 여유가 더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나로서는 할 만큼 했다, 생각하며 집으로 가려다가 유성도서관 입고 도서를 다시 검색해보았다. 한 도서관에 같은 책을 두 권씩 비치해 놓는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같은 책이 한 권 더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도서관으로 출발하기 전에 엄마가 주신 책 세 권을 반납하려다 책 제목을 살펴보았다. 그중 한 권의 제목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모녀의 세계』라는 제목이었다. 그 책을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했다면 그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대출했다가 반납한 책이었다는 것이 놀라움을 배가시켰다. 엄마는 소설을 주로 읽고 심리학 냄새가 풍기는 책은 잘 읽지 않는다. 내가 심리적 자기계발서를 몇 번 권한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책이 어렵다고 하면서 읽지 않았다. 어렵다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모녀의 세계』 서문에는 저자가 모녀 관계의 심리에 대해 책을 쓴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보인 두 가지 반응이 나와 있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대단한 엄마’를 가진 딸들은 책을 당장 써달라고 한 반면, 모녀 관계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 남성이나 모녀 관계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은 모녀 사이에 그런 어려움이 있느냐고 반응했다. 흥미로웠다. 따라오는 본문도 얼른 읽어보고 싶었다. 유성도서관에 다녀온 후 읽어보려고 이 책을 대출했다.     


    사십 대 중반인 저자가 이십 대였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녀는 자기 어머니의 묘소를 13년 동안이나 찾지 않았다. 이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녀는 불면증 치료를 위해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엄마에 대한 분노가 자신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신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는 옆에 있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느라 바빠 그 일을 알지도 못했다. 당시 겨우 다섯 살이었던 저자는 엄마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 큰일을 말하지 않고 혼자서 놀란 가슴을 달랬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엄마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내적 좌절감’ 때문에 그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을 저자는 상담을 받으면서 깨닫게 된다. 그때의 충격과 또 다른 종류의 이해 불가한 행동들로 인해 그녀는 어머니를 미워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저자에 의하면 그녀의 어머니는 육아에 재능이 없었고, 딸에게 질문하지 않았고, 딸을 혼자 두는 엄마였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 인생에 자기 문제만 가득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저자의 어머니는 딸이 기대하는 좌표에서 조금 어긋난 사람이었지만 저자는 엄마가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마의 골칫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저자가 느꼈을 외로움과 불안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저자 내면에 자리했던 유기 불안 - 엄마가 자기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 은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며 누군가와 오랜 관계 맺는 것을 방해했다. 애증의 관계라고 쉽게 말해지는 이러한 모녀 관계는 우리의 존재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가!     

    악몽과 불면증은 어머니를 자기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바쁜 삶을 살던 저자의 무의식이 어머니와 화해하라고 부르는 초청장이었다. 상담을 받으면서 저자는 애써 파묻어놓았던 엄마의 기억을 발굴하며 ‘나에게 엄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나 역시 내 엄마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분열되기 직전의 상태까지 가보았던 사람으로서 저자의 마음이 너무나 잘 이해되었다. 엄마도 인간이므로 완전할 수 없고,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선과 악을 동시에 담고 있는 존재라는 말을 새기고 또 새겨 보아도 내 어머니의 이중성과 모순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나였기에 저자의 치유 과정이 몹시 궁금했다.       

    한마디로 말해 저자가 치유되어가는 과정은 그녀의 어머니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어느 날 꿈에서 그녀는 메두사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어머니를 만나는데 그 후부터 어머니를 하나의 통합된 인격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포기한다. 놀랍게도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를 해석하고 깔끔하게 통합하고 싶어’ 했지만, 이 꿈을 통해 ‘한 인간을 어떤 사람이라고 분류하고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도 저자와 마찬가지로 엄마를 해석하고 정의하고 통합하려고 애쓰는 중인지라 저자에게 깊이 몰입되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깨진 유리병처럼 산산이 부서진 인격을 가진 존재여서 저자는 어머니의 어느 조각에 반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어머니 사후에는 그 존재를 외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는, 어쩌면 어머니의 수많은 다른 모습들은 힘든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썼던 가면이었을 것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저자의 깨달음이 나에게도 자유를 주었다. ‘그래, 엄마를 어떤 사람, 어떤 존재라고 규정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야. 어쩌면 불필요한 일일지도 몰라.’ 엄마와 다르게 살기 위해 일관성과 통합성에 집착하는 나 자신도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할 때가 있고 모순된 욕구를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난 여성들이 그들의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유사한 경험들도 소개하고 있다. 엄마로 인해 괴로워하는 딸들이 이 세상에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저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공론화할 공간을 마련해준 저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단순히 경험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족 역동의 관점에서 그 경험들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이야기 중에서 ‘모녀 관계에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라는 세간의 신화를 반박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수많은 모녀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힘들고 서로 때문에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갈등인지 규정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관계에서는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을 모녀 관계에서는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친구 사이에서라면 비정상으로 여겨질 충고와 지시를 엄마는 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한다는 저자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이것은 보웬의 가족치료 이론에서 나온 ‘밀착’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건강한 경계선이 없는 관계를 의미하는 ‘밀착’ 개념은 나도 익히 알고 있었건만 이것을 모녀 관계에 적용해보지 않았기에 저자의 분석이 참신하게 와 닿았다.     

    또 저자의 어머니가 전매특허로 사용했던 이중 메시지도 나의 주목을 끌었다. 어머니의 이중 메시지 때문에 큰 혼란을 겪었던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엄마의 ‘환장하게 하는’ 말들이 떠올랐다. 저자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는 남편을 세상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면서 남편이 가끔 집에 올 때는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엄마의 편이 되어 아빠를 미워하는 일에 가담했던 저자로서는 엄마의 이중적인 태도가 배신으로 느껴졌다. 내가 저자를 만난다면 우리 엄마가 사용한 이중 메시지 이야기를 하면서 밤을 새울 수 있을 것 같다.      

모녀간에도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처방이 나의 최근 행동을 변호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저자는 모녀가 서로 ‘적당한 거리와 균형을 유지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며 심리적 독립을 이룰 것’을 제안하는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와의 거리두기를 선언한 나를 지지해주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감정을 정당화해주는 근거를 들이대지 못하고서는 누구를 마음 놓고 미워하지도 못했던 나에게,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여성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또 나의 엄마는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끝까지 읽기는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 책의 이야기를 엄마와 함께 나눌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성장했고 그녀 안에 있는 어머니도 상당 부분 통합되었다고 후기에 쓰고 있다. 글쓰기의 힘을 절감하게 하는 말이다. 글은 쓰는 이에게도 읽는 이에게도 힘을 주는 놀라운 도구이다. 실제 경험보다는 글로 세상을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나 자신에게 회의하기를 여러 번 했지만, 나 같은 사람은 글이 아니면 세상을 부분적으로밖에 배울 수 없으니 글과 책이 있는 것을 백번 고마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글로 세상에 보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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