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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Sep 11. 2022

앤과 나; 모욕에 대처하는 방법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독후감

   내가 앤 셜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이다. 앤은 생각에 솔직하고 감정에 솔직하다. 남의 집 밥을 십년쯤 먹었으면 눈치가 발달하여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을 하려고 할 텐데 이 아이는 그렇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마릴라와 매슈 남매가 앤을 입양하기로 결정한 후 이 주일 만에 이웃인 레이철 린드 부인을 만난 날, 앤의 지나치게 솔직한 성격이 드러난다. 린드 부인은 어느 곳에나 있는 참견꾼이다. 호기심 많고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그녀는 좋은 의도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다. 진심으로 마릴라를 걱정했기 때문에 고아를 입양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경고했던 그녀는 앤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는 이 아이의 외모를 가지고 품평을 한다. 마르고 못생기고 주근깨 투성이에 당근 같은 빨강색 머리는 앤 스스로도 싫어하는 특징인데 린드 부인은 마치 그 엄연한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듯이 거리낌 없이 말한다.

    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린드 부인에게 예의를 모르고 배려심도 없다고 말했다. “아주머니도 뚱뚱하고 굼뜨고 상상력이라곤 한 톨도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어요? 아주머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린드 부인과 똑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 앤의 말이 너무 시원했다. 마릴라는 어른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앤을 꾸짖으면서도 내심 거만한 린드 부인을 한방 먹인 것에 대해 고소하다고 느꼈다.

    결국 앤은 매슈와 마릴라를 위해 린드 부인에게 사과하기로 마음먹지만 그 사과의 의식을 화려한 언사를 동원해 연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숨겨진 유머와 감식력을 갖춘 마릴라는 앤이 사과의 말을 준비하면서도 마치 연극대본을 쓰듯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재미있어 한다. 작가는 이 작은 에피소드를 통해 앤의 꼿꼿한 자존심과 마릴라의 내적 혼란, 린드 부인의 단순한 성격을 잘 그려낸다.  


    열 살 무렵의 나는 아무리 화가 나고 슬퍼도 내 감정을 드러내지 못했다. 누구에게 잘잘못이 있느냐를 가리기 전에 상대가 화를 내면 나는 무조건 움츠러들었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이 옆 반에 무언가를 갖다 주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웬일인지 나는 그때 껌을 씹고 있었다. 옆 반 선생님은 곱슬머리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그는 나의 임무가 아닌 내 입에 집중했다. 그가 “껌 뱉어!” 하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내 입에 껌이 있는 것을 알았다. 내가 내 손 위에 껌을 뱉어내자 그는 그 껌을 집어가더니 내 머리에 “철썩!” 소리 나게 붙였다.      나는 부끄러움과 모욕감에 휩싸였다. 학교에서 껌을 씹는 것은 분명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한 처벌 방식을 결정할 권한이 선생님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화가 나고 슬펐다. 그 감정은 죄책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벌을 받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이 일이 칠십 명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할 만한 악행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 후로 나는 그 선생님을 피해 다녔다. 그는 내 머리에 껌을 붙인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겼을까? 어쩌면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 후로도 그 선생님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열 살 내가 너무 가엾다. 그때 그린게이블스의 앤을 알았더라면 선생님께 대들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를 정당하게 미워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선생님만 생각하면 수치심을 느꼈지만 그것이 모두 내 탓이라고만 생각했지 선생님이 지나쳤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사건을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그 순간 그 교실에 있었던 아이들은 그것을 목격했지만 나의 당혹감과 수치심을 다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사건이 잠시 그들의 관심을 끌었을 수 있지만 그들의 기억에서는 금방 잊혔을 것이다. 안 그래도 마음이 여렸던 나는 한동안 대인공포증이 생겼다. 특히 권위적인 어른들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심했다. 

    당시 나에게는 마릴라와 매슈 같은 어른이 없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어른이 없었다. 마릴라와 매슈는 아이를 길러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신중하게 앤을 관찰했지만 내 주변에는 버릇없는 아이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은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린드 부인 같은 어른들만 있었다. 자라면서 나는 나처럼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끌렸다.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자기 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주고 싶었고 그들의 권리를 알려주고 싶었다. 내 일에는 권리 주장을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변할 때는 어디서 나는지 모를 용기가 나왔다.       

    나는 빨강머리 앤의 이 대목을 읽으며 나의 옛 상처를 기억해내고 아이들이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다진다. 모욕은 그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게 할지 몰라도 아이의 자존감을 짓밟고 모욕감을 돌려주고 싶은 복수심을 기른다. 마릴라가 미워할 수 없는 사고뭉치 앤을 엄격하고 일관성 있게 훈육한 덕분에 4년 후 앤은 성숙한 숙녀가 되었고, 양어머니격인 마릴라가 병든 몸으로 혼자되었을 때 앤은 자신의 꿈을 보류하고 기꺼이 마릴라 곁에 남겠다는 결정을 한다. 받은 사랑을 되돌려줄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이다. 마릴라도 앤을 기르면서 곧기만 하던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해진다. 결국 사람을 아름답게, 즉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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