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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Sep 02. 2022

존엄한 삶을 위해 곤란을 택하다

이순자의『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독후감

    작년 이맘 때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이순자 작가의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읽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최고의 주부로 인정받았지만 35년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은 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이 든 여자가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일을 경험한다. 수건 접기, 건물 청소, 어린이집 주방 일, 아기 돌보미 등 자격증이 필요 없는 일부터 요양보호사, 장애인 활동 보조사 같은 전문적인 돌봄 노동까지 그녀가 거친 일자리는 모두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고학력이 구직에 방해가 된다는 말에 학력을 중졸로 세탁하고 들어간 일자리는 오랜 세월  고된 가사일로 체력이 약해진 그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덜 고된 일자리를 찾았나 하면 그곳의 비리를 못 본 체 할 수 없어서 입을 열고, 결국 그만 두게 된다. 돌봄 노동을 할 때는 성추행에도 시달린다.

    나는 그녀의 글을 통해 노인, 특히 여성에게 허락되는 일자리는 자존심을 버리거나 양심을 팔아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실버 노동 시장의 실태가 어떤지 알았다면 그녀는 황혼 이혼을 하는 데 좀 더 신중을 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를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는 작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딸이 어머니의 유고를 모아 낸 책이다. 이 책의 광고 기사를 통해 작가의 죽음을 알게 된 나는 그녀의 유고집을 읽어 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작가가 살아있는지 이미 죽은 사람인지 여부는 독자에게 매우 다른 인상을 준다. 그녀 생전에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읽었을 때는 나보다 연배가 조금 높은, 사연 많은 여성이라는 정도의 느낌을 받았는데 그녀가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읽을 때는 슬픔과 연민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 책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과 결혼생활 이야기가 좀 더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청각장애로 인해 오해와 차별을 받았지만 그녀에게는 서러움과 분노 대신 사랑이 가득했다. 청년 시절 지성적인 친구들과의 교제와 독서를 통해 그녀에게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생기기 시작했고 의로운 분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직장을 다닐 때는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결혼과 함께 그녀의 사회의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벙어리 삼 년을 요구하는 시집살이는 청각장애가 있는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 어른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 생활 에피소드는 결혼 후 첫 명절에 맞이한 100명 손님상 차림 사건에서 시작하여 남편의 외도로 끝난다.  

    일제 강점기에 맞먹는 35년 세월을 남편과 집안에 바친 결과는 너무 초라했다. 외도의 이유가 아내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없어서였다고 하는 남편에게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가정을 떠났던 그녀의 결기가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가난도 참아내고 차별도 견뎌냈던 그녀이지만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구직센터에서 문전박대당하고 고용주에게 무시당할 때도 그녀는 이혼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루를 살아도 가부장사회의 권위에 종속되어 살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흔도 안 되어 하늘로 갔지만 그녀는 ‘분투기’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사람에게 배신당하고도 사람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특히 노인과 장애인을 사랑했던 그녀, 이 사회의 차별과 부조리에 맞서 싸우다 스러진 그녀에게 자꾸 잔다르크의 모습이 겹쳐진다. 남들의 눈에는 무모하게만 보였을 그녀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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