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친구들의 방문
현충일을 앞두고 아빠의 해군사관학교 동기생 두 분이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작년 여름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는 코로나가 극심하여 조문하러 오지 못하셨는데, 대전에 계시던 또 한 분의 동기생이 올 초에 돌아가셔서 1년 사이 대전 현충원에 새로 입소한 동지가 둘이 되자 합동 참배를 하러 오신 것이다. 올해 돌아가신 분은 엄마의 절친 이봉심 여사의 남편이다.
나를 “소라!”라고 부르며 반가워하시는 아빠 친구들의 얼굴에는 젊었을 때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사람이 건강하면 팔십 대 중반에도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분은 차도에서 묘역으로 올라가는 경사로를 지팡이도 없이 거뜬히 걸어 올라가셨다. 반면 동행하신 세 명의 부인 중 우리 엄마가 가장 건각이고 최근 미망인이 되신 이봉심 여사는 다리가, 남편이 살아계신 정 여사는 허리가 아파서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아 근근이 올라가셨다.
서울에서 오신 두 분 중 한 분은 지금도 인도네시아를 왕래하며 무역업을 하고 계신다. 또 한 분은 은퇴한 지 한참 되셨지만, 사진을 잘 찍으시고 포토샵도 할 줄 아셔서 동창 회보에 회원 동정을 맡아서 올리신다. 다녀가신 날 찍은 사진과 함께 회보에 올릴 기사를 만들어서 다음날 보내주실 정도였다.
우리 아빠와 이 여사의 남편 묘소를 참배한 후 나를 포함한 부인들은 주차장에서 쉬고 아저씨들은 열세 개 묘소를 더 참배하셨다. 정 여사의 남편이자 대전 동기생 중 유일하게 생존하신 김 박사님이 차로 아저씨들을 모셨다. 참배할 묘소가 열세 개라니! 젊은 나도 기겁할 숫자였다. 사망 일시가 다 다르니 동기생들이 한 묘역에 모여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그 많은 묘소를 다 참배한다는 것이었다. 현충원은 한 묘역 당 수백 개의 묘소가 있고, 차도에서 바로 연결되는 묘역이 있는가 하면 우리 아빠가 묻힌 713 묘역이나 이봉심 여사의 남편이 묻힌 715 묘역처럼 경사로를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곳도 있다.
아저씨들의 건강과 열정에 감탄하며 부인들과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식당으로 이동했다. 부인들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대사는 ‘소라 엄마는 딸이 있어서 좋겠소’라는 정여사의 말이다. 훌륭하게 키워놓은 아들들이 있지만, 딸만큼 정답고 살갑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 말이 립서비스라고 생각했지만 들을수록 진심인 것 같았다. 정여사는 나를 정말로 좋아하신다. 내가 엄마 집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그리고 세 분이 만날 때 엄마를 가끔 약속 장소로 모셔다 드린다는 이유로 정 여사는 나를 효녀라고 부르신다. 효녀라는 칭찬이 별로 달갑지 않지만 나는 어른들 앞에서는 효녀인 척한다. 엄마 체면도 세워드리고 내 품격도 올라가니 나쁠 것도 없다.
나도 교양 있고 배려심 있는 정 여사를 좋아한다. 정 여사는 팔십 대 초반이지만 중년일 때의 스타일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선팅이 된 금테 안경, 호피 무늬 의상, 그리고 하이힐은 정 여사의 시그니처 패션이다. 허리 골절로 수술한 후 몇 개월을 침대에 묶여 지내셨지만 외출할 때는 예의 세련된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집에서 친구들을 대접할 때는 음식을 화려한 식기에 격식 차려 담아내신다. 후식으로는 질 좋은 와인과 최고급 안주를 내놓으신다. 그뿐인가. 정 여사는 남편을 언제나 존대하고 “여보옹”하고 부르신다. 우리 엄마와 이봉심 여사는 그런 정 여사를 보고 콧소리 한다고 놀린다.
묘소 참배를 마치고 근처 중식당으로 이동했다. 식사하는 내내 오고 간 대화는 육십 대 초반인 내 동창들의 대화라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대화였다. 대화가 젊다는 말은 노인들의 대화에 의례 등장하기 마련인 건강 문제나 자식 자랑 등이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노인들이 많이 포함된 모임에 가면 몸의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 또는 어떤 병에 좋은 식품은 무엇인지 하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노인 세대의 건강 이야기는 병과 죽음과 직결되는 이야기라 어쩔 수 없이 분위기를 어둡게 한다. 자식 이야기는 자랑할 자식이 있는 사람에겐 으쓱해질 기회를 주지만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을 가진 사람에겐 시기와 질투를 유발한다. 그 때문에 이 두 가지 주제는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주범이다.
오늘 회동한 세 명의 남자는 사관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스무 살 무렵에 처음 만났고 세 명의 여자는 이십 대 중후반에 만나 지금까지 알고 지냈으니 최소 육십 년 지기들이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그 만남이 과거를, 젊은 시절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해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은 부부가 함께하는 모임과 행사가 많았기 때문에 남의 배우자와도 내외하지 않고 모두 친구처럼 지내신다. 그래서 서울 아저씨들이 부인들과 동반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좋았던 것이다.
어른들은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사람들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대표단으로 오신 아저씨 중 한 분은 얼굴은 팽팽한데 머리는 완전히 벗겨져서 반들반들 윤이 났다. 아저씨는 당신의 머리를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하셨다. 이십 대인 외손자에게 탈모가 시작되었는데 그 아이가 자기의 탈모를 외가의 유전자 때문이라고 우겨서 가발 맞추라고 백만 원을 주셨다는 것이다. 그 말에 통 큰 할아버지라고 하며 모두 웃었다. 건강과 경제력이 있는 노년은 추하지 않다.
우리 엄마의 행동이 가장 놀라웠다. 옛 친구들 앞에서 엄마는 평소 나와 이야기할 때 보이던 감상주의와 편협한 사고를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가족들끼리 만날 때나 대전에 계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엄마의 억지 유머나 관심 끌려는 모습 때문에 눈살을 찌푸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 자리에서 엄마는 진짜 유머, 세련된 유머를 구사했다. 이것이 엄마의 젊을 때 모습이었던가? 그렇다면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 성격이 나빠진 것인가? 궁금했다. 노인들이 좋은 성격과 정신건강을 유지하려면 옛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오늘은 아빠의 빈자리를 이 친구들이 채워주고 있어서 엄마가 온전해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분들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아빠와 많은 것을 공유한 아저씨들이다. 당시엔 대체로 가난한 집안 출신 중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니 어린 시절 배경까지 비슷할 것이다.
군사정부 시절 이 장교 집단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직업적 자부심이 대단했고, 평생 국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아저씨들은 그동안 태극기 부대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하셨다고 한다. 태극기 집회에 합류하기에도 이 어른들은 너무 고령이다. 그러나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건강과 열정이 있는 이분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장이 있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아빠의 친구들을 만나고 옛 기억을 소환하고 보니 우리 부모가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어려운 중에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도 언젠가 말했었다. “고생스러웠어도 우리는 좋았다. 너희들이 다 착하고 공부를 잘했잖니”라고.
그런데 착하고 공부 잘했던 엄마 아빠의 자식들이 지금은 엄마를 미워하고 아빠를 원망한다. 게다가 아빠 없는 엄마의 일상이 너무 초라한 것이 나는 속상하다. 가난해서 초라하다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어른스럽게 살지 못하는 것이 내게는 초라해 보인다. 부부의 삶이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사는 것이고, 결국은 각자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도 남은 사람은 여전히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스콧 니어링 부부와 나의 시어머님이 생각난다.
스콧 니어링은 실천하는 지성으로 아내 헬렌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죽을 때도 아름다운 죽음의 본을 보임으로써 아내의 존경을 받았다. 헬렌 니어링 역시 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나의 시어머니는 짧지 않은 아버님의 투병 생활을 최선 다해 돌보며 불평하지 않으셨다. 아버님 사후에는 외로움을 호소할 만도 하건만 변함없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시며 최고의 영성을 유지하고 계신다. 쇠약해져 가는 육신은 어쩔 수 없지만, 아플 때는 ‘누가 대신 아파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잠이 안 올 때는 ‘누가 대신 자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하시는 말씀에 나는 감동받는다.
내가 엄마에 대한 피해의식이 커서 엄마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부모상이 지나치게 이상적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지혜로운 부모는 되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부인, 누군가의 친구로서는 좋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는 “누구에게나 갑자기 부모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행복의 기본 조건일 것이다. 나의 생애에서 오십 대 중반까지 일어난 사건들은 받아들일 만했다. 난치병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 나이 육십에 맞닥뜨린 아빠의 노망과 엄마의 퇴행은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다. 노망난 아빠는 내 아빠가 아니라고, 퇴행한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다. 나는 두렵다. 부모가 실패한 일을 나는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