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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10. 2019

사과를 배우다

진정한 사과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를 살며(독후감)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부터 나는 이 책을 필독서 목록에 올려놓았다. 진정성 있는 사과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늘 고민해왔던 나에게 이 책은 가해자의 가족이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열세 명의 사망자와 스물네 명의 부상자를 낸 컬럼바인 고교 총격사건의 두 범인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가 쓴 이 책은 고통의 서사시라 할 만하다.


  불가항력적인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이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서 수많은 작가와 학자들이 글을 썼다. 고통을 그저 감내해야 하는 수동적인 입장일 때도 우리는 분노와 슬픔, 죄책감 따위의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이런 경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상대를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뼈저린 후회와 속죄를 하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식을 잃은 아픔(총격사건 후 아들은 자살했다)을 호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살 수도 있었지만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심지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사건 이후의 대처방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이혼까지 하게 된다. 그녀는 왜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희생자들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달하려 했던 것일까?


  사건 직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저자와 가족들은 보복의 두려움 때문에 아들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들 가족을 상대로 수많은 소송이 제기되다. 그러한 소송에 대해 법률적인 대처를 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법적 문제와 상관없이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저자의 진술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은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그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알아가야 한다고 결심하는 부분이다. 살인자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가정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던 자신의 아이를 잃은 아픔이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그녀는 피해자들에게 개인적인 사과의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공식적인 사과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하였으나 저마다 다른 슬픔을 느꼈을 피해자 각각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저자는 이 일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고 쓰고 있다.     


  수 클리볼드는 총격사건 이후 얼마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끔찍한 그 현실이 꿈이었기를 바라는 강한 소망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당혹감이 여전히 남아있는 와중에도 그녀는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누군가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얼마나 비난을 피하고 싶었을까? 얼마나 변명을 하고 싶었을까?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는 다른 사람들이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자신은 위로받지도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더 불쌍하다고 항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살인자의 부모로서 사과를 하는 것이 그들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역지사지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이 무얼까 궁금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배려하는 사람이다. 작금의 시대는 배려가 미덕임을 말로는 다 인정하지만 참된 배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녀의 배려심 때문에 그 아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지만 살인자의 부모였기 때문에 그녀의 배려심이 폄하되어서도 안 된다.

 

  그녀의 배려에서 내가 배운 것은 용서를 구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단계부터 실패하기 일쑤이다. “잘못을 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상대방이 원인 제공을 했다.” 등으로 변명을 하고 싶어 한다. 변명이 따르는 사과는 화난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다. 사과의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저자가 그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막내가 다니는 중학교 학교폭력 자치위원회(줄여서 학폭위)에 두 번 참석하였다. 지역사회봉사 차원에서 자원하였는데 배우는 바가 많다. 중학교 수준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지만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가해자 부모들이 학폭위의 결정에 불복하기 일쑤이고 재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일반 법정에 소송을 걸어 기어이 잘못이 없다는 판결을 받아내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인지상정이다. 학교에서 징계를 받으면 자기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는데 불이익을 받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대학 진학이 지상목표인 우리 사회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자식이 잘못된 행동을 했으면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도록 지도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당연한 역할이거늘 이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들은 자식의 미래를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지위와 권력, 그리고 재력을 가질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팽배해있다. 딜런 클리볼드가 자살하지 않고 붙잡혔다면 수 클리볼드도 그와 같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식이 응당한 처벌을 받기 원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식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길 바랐을 것이다.     

 

  나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이 책을 읽었다. 그러다 저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죄의 대속(어떤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제삼자가 벌을 받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핵심 교리이다. 기독교에서 대속이란 하나님이 우리 대신 사과하시는 것이다. 진정성을 의심받으면서도 사과하고 또 사과하는 저자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통해 사과하신다. 저자의 겸손한 사과를 보면서 갑자기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은 우리에게 사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 때문에 네가 고통을 당했구나.” 때로 이 사과는 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누구로 인해 너희가 고통을 당했지. 미안하다. 내가 대신 사과한다.”


  언제나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아 인간의 죄를 판단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만 생각해왔었다. 영화 '밀양'은 그리스도인들의 그런 나이브한 믿음을 꼬집었다. 주인공의 아들을 죽인 범인은 자기가 하나님께 용서받았기 때문에 자기 죄가 다 해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주인공에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런 속죄는 무효하다는 것이 주인공의 외침이다. 성경도 죄를 지으면 해를 입은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용서를 싸구려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용서는 형식적인 회개라는 동전을 집어넣으면 자동적으로 나오는 콜라캔이 아니다. 용서해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의 고통을 범죄자가 이해하기 전에는 진정한 참회가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진정한 용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옳은 삶인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그저 편안한 삶,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 타인의 선망을 받는 삶만을 원한다. 그런 것을 갖춘 삶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윤리와 도덕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고 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법과 사회규범이 심각한 일탈행동을 규제하기는 하나 선한 행동을 격려하지는 않는다. 선한 행동, 도덕적 행동은 개인의 양심에 맡겨져 있다. 그러니 사회의 지도자라면 이 양심의 건강을 어떻게 키우고 유지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 진영의 적대감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 삼척동자도 내로남불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본다는 말이나,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극악무도한 살인자의 부모가 사과를 했다는 것이 무슨 미덕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일수록 더욱 사과하기가 어려운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정치란 것은 상대 진영의 허물을 지적하지 않고는 되지 않는 것인가? 누구 말이 맞는지 따지는 것을 이제는 그만하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이나 기관이나 단체가 나왔으면 좋겠다. 비난과 변명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이 세상에 사과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진심 어린 사과의 결과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을 현실세계에서도 보고 싶다. 청소년의 폭력 문제에 개탄만 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폭력 아닌 다른 수단을 쓸 수 있음을 우리 어른들이 몸소 보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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