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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10. 2019

올챙이와 개구리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오월에 한밭 수목원에서 올챙이 열 마리를 잡아왔다. 그중에 세 마리를 막내 아이 친구네 집에 분양해주고 나머지 일곱 마리를 키웠다. 이사 기념으로 이웃에게 선물 받은 유리화분의 죽은 화초를 걷어내고 수경재배가 가능하다는 다른 화초를 심고 물을 채운 후 올챙이를 넣어주었다. 이 올챙이 집의 단점은 바닥이 진흙으로 덮여 있어서 물을 갈아준 다음에는 속이 보일 정도로 맑아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신기하여 올챙이가 잘 있는지 하루에 몇 번씩 들여다보던 아이들도 한 열흘 지나니 시들해졌고 나는 나대로 바쁜 생활에 쫓겨 올챙이의 존재를 잊어갔다. 가끔씩 생각나면 죽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어항 물을 휘저어 올챙이의 수를 세어보았다. 올챙이는 쌀밥을 먹는다고 해서 밥풀을 넣어주었으나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후론 화초에 붙은 이끼라도 먹겠지 하는 마음으로 밥도 주지 않고 방치하였다. 


  그러던 중 칠월에 금붕어 몇 마리를 샀다. 금붕어를 기르기에는 올챙이가 살고 있는 그 어항이 안성맞춤이었다. 이번에는 어항 속에 있는 흙과 돌을 다 걷어내고 이끼를 다 닦아냈다. 대대적인 작업을 거쳐 금붕어와 올챙이를 함께 키웠다. 신기하게도 올챙이는 숫자도, 모양도 거의 그대로였다. 이제는 올챙이의 움직임을 늘 볼 수 있게 되어 좋았다. 그러나 화려한 색깔과 지느러미를 뽐내며 헤엄치는 금붕어에 비하면 시커먼 반점 투성이인 올챙이는 너무 볼품이 없었다. 

  막내의 친구가 키운 올챙이는 유월에 이미 개구리가 되어 놓아주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 올챙이는 열악한 환경 때문에 변종이 된 것 같았다. 영원히 개구리가 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나를 원망하였다. 왜 올챙이를 잡아왔느냐, 지금이라도 놔주자, 하면서. 그러나 식물이든 동물이든 잘 돌보지도 못하면서 키우기는 좋아하는 나는 올챙이를 계속 키우기로 하였다.

 

  팔월의 어느 무더운 날, 올챙이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작은 돌기가 두 개 나오더니 금세 발가락 모양이 나타났다. 나는 흥분하여 아이들을 불렀다. 뒷다리가 나오고 이틀 만에 앞다리가 나오더니 몸 색깔이 점점 초록으로 변해갔다. 개구리가 되기 직전의 올챙이는 물 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어항 벽에 붙어서 잠도 많이 잤다. 그러더니 뒷다리가 나온 지 사흘 만에 꼬리가 떨어지지 않은 것만 빼면 완전한 개구리의 색깔과 형상을 띠었다.  

  어제는 유성 도기점에서 작은 떡시루를 하나 샀다. 휴가 때 수덕사에서 사 온 물양귀비를 키우기 위해서이다. 시루 항아리 속에 물양귀비 화분을 통째로 넣고 물을 더 부어 주었다. 그때 무언가 팔딱하고 튀어나오는 데 자세히 보니 손톱만 한 청개구리였다. 지난번에 어항에 있던 올챙이 두 마리를 물양귀비 화분에 넣어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개구리는 너무 작고 귀여웠다. 꼭 아이들이 보는 자연관찰 책에 나오는 개구리처럼 앙증맞았다. 꼬리가 달린 개구리도 친구 하라고 이 항아리 속에 넣어주었다. 나는 아침마다 봉오리를 터뜨리는 물양귀비와 개구리를 보기 위해 베란다에서 한참을 앉아 있곤 한다.


  영원히 개구리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올챙이가 한순간에 개구리가 되는 것을 보면서 큰 딸아이를 키울 때가 생각이 났다. 큰 아이는 더디 자라는 아이였다. 아기 때는 우량아였는데 자라면서는 살이 빠져 마르고 키도 작았다.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보니 공부가 떨어졌다. 어려서 말을 빨리 배웠기 때문에 영특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터라 실망이 되었다.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둘째가 대여섯 살 되니 큰 아이의 느림보 걸음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피아노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고 영어도 같이 시작하였는데 선생님들은 내게만 들리게 귓속말로, "둘째가 더 나아요." 하는 것이다. 세 살 아래인 동생보다 학습 속도가 느린 아이, 이 아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이의 모자람은 나의 수치였고 집안의 수치였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큰 아이는 유치원에 다닐 때도 적응하기 어려워하더니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매일 같이 우는 소리를 하였다. 반 아이들과 사귀지 못하고 작은 일에 상처 받기가 일쑤였다. 사실은 작은 일이라 할 수 없는 사건들도 있었으나 아이가 유약하여 상처 주는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점도 있었다. 딸아이를 달래고 안심시켜 매일매일 학교에 보내는 것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정서적으로 아이와 분리되지 못하고 아이의 실패를 나의 실패로, 아이의 상처를 나의 상처로 받으며 아이와 함께 하루하루를 시든 풀처럼 살았다.   


  이 무렵에 알게 된 책 읽기 모임을 통해 나는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과 그러한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남들은 아내 노릇, 엄마 노릇을 문제없이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책 속에서 발견하면서 많이 위안이 되었다. 또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책을 읽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배운 지식과 지혜를 아이 키우는 데 적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신기할 정도로 큰 도움이 되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도 아이는 비슷한 문제로 계속 힘들어하였으나 엄마인 내가 아이와 심리적으로 거리 두는 법을 배우면서 나의 좌절감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의 교육철학은 "뛰어난 아이를 기르는 것"에서 어느새 ‘행복한 아이를 기르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이것저것을 시도해보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효율적인 부모역할훈련을 통해 아이와의 대화기법을 배워 공감을 많이 해준 것, 아이가 5학년일 때 둘이서만 목포까지 기차여행을 다녀온 것, 중학교 때 학교 공부와 아무 상관없는 컴퓨터 그래픽 학원에 일주일에 세 번씩 데리고 다닌 것, 고등학교 때 아이가 원하는 과외 활동(합창반, 만화동아리, 전자기타 교습)을 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고등학교 무렵 아이의 또래들은 취미활동은 중단하고 오로지 입시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모회에 나가면 아이들 공부 이야기밖에 하지 않아서 나는 모임에 몇 번 나가다가 중단하였다. 나의 행동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는 이해받고자 하지도 않았다. 바로 지금 내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면 미래가 행복할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우리 아이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교육목표였다. 


  만화를 전공하고 싶어 하는 아이를 미술학원에 등록시킨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미대에 진학하기 위한 준비로는 늦은 감이 있었으나 아이가 원하는 공부를 하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때 나의 속물적인 욕심이 발동하여 아이를 만화과 대신 시각디자인과로 방향을 틀도록 조종하였다. 만화를 전공하면 그것밖에 할 수 없지만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면 직업선택 범위가 넓을 것이라는 내 맘대로 식 논리를 갖다 붙여서 아이를 설득하였다. 2년 동안 지옥훈련에 버금가는 실기학원 생활에 아이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미술에 대한 애정을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 같았다. 결국 아이는 가, 나, 다 군에서 모두 낙방하였고 재수를 준비하게 되었다. 실기 준비에 몸이 수척해진 아이가 딱하여 1학기에는 교과 공부에 주력하고 2학기부터 다시 미술학원에 다니도록 하였다. 그 해에 늦둥이 딸이 태어났고 나는 재수생인 첫째의 공부에 대해서는 완전히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성적이 쑥쑥 오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체능계열 학과에서는 거의 반영하지 않는 수학 점수가 껑충 뛰었다. 아이는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이었다. 2학기가 되었으나 아이는 미술학원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에도 미술학과에 못 간다면 철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아기 때문에 큰 아이 진로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이제는 없었다. 아이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학원비만 지원해주었다. 

  수능시험에서 아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좋은 점수를 얻었고 대학 합격소식과 더불어 날아온 장학금 소식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아이 교육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의 이 작은 성공은 예상된 것이 아니었기에 더 감격스러웠다. 아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보너스를 더 받았는데 그것은 상처 많은 이 아이가 속 깊은 아이가 되어 고등학생 때 이후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 역할을 하고 엄마에게는  훌륭한 상담자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나는 후배 엄마들에게 가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의 실패 때문에 기가 죽어 있거나 속상해하는 엄마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이 이야기를 해준다. 아이가 공부 좀 못한다고, 친구 좀 못 사귄다고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다. 나는 엄마가 진정 걱정할 일은 아이의 행복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거라는 엄마식의 행복론은 집어치우고,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지를 아이 스스로 찾고 발견하도록 허락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엄마의 일이라고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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