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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14. 2019

중학생 북클럽 이끌기

교사의 자질이란

   아이들과 함께하는 동네북 클럽이 해를 넘어가려 한다. 막내가 책을 많이 읽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나 궁리하다가 아이의 친구 세 명을 포섭하여 북클럽을 결성했다. 독서 편식을 막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고르느라 고심했다. 그렇게 고른 책들의 목록을 미리 나누어주고 한주에 한 권씩 읽고 와서 토론하기로 했다. 어머니들도 쌍수를 들고 환영해주어서 시작은 순조로웠다. ‘동네북 클럽’이라는 귀여운 이름도 아이들이 직접 지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이 책을 읽어오지 않거나 가져오지도 않는 일이 잦아졌다. 그중 한 놈이 특히 책 안 읽은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변명을 하여 내 약을 올리곤 했다. 이렇게 아이들의 태도가 불성실해지고 어머니들도 책을 미리 읽고 올 수 있게 협조해주지 않아서 점점 힘이 빠지고 모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오늘도 다소 피곤한 상태로 아이들을 맞았다. 겨우 열 세 살짜리들인데도 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때가 많았었기에 아이들의 말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모임을 시작하였다. 


  지난주에는 책을 준비한 아이가 둘 밖에 없었고 게다가 읽어 온 녀석은 한 놈뿐이었기에 나 혼자 떠드는 시간이 되었었다. 나의 소양이 심히 부족한 한국 역사와 지리 분야의 책이었기에 나의 설명도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같은 책을 한 주 더 보기로 하고 오늘 올 때는 각자 퀴즈를 10 문제씩 만들어 오는 숙제를 내주었었다. 한 놈은 아파서 안 오고 한 놈은 겨우 어제에야 책을 받았다고 하고 두 놈만이 퀴즈문제를 내왔다. 따지고 보면 오늘은 학교 축제가 있는 날이기에 낮 동안에 힘을 많이 소모했을 텐데 북클럽에 와 준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퀴즈문제를 내 온 녀석들도 건성으로 냈을 거라 생각하고 문제의 답을 모를 거라 예상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문제 낸 녀석들은 자기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런 숙제를 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늦게 받아 읽어오지 못한 녀석에게는 불리할 수 있어서 그 아이에게 대답할 수 있는 우선권을 주기로 하고 퀴즈를 계속하는데 이 녀석이 주관식 문제에서 너무나 탁월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지난주에 내가 다루었던 내용이기는 하였으나 나도 더듬거리며 설명했던 터라, “책도 안 읽은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물으니 지난 시간에 내가 설명해주어서 안다는 것이었다.


  아, 나는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지난 시간 내내 거의 졸고 있었던 그 아이는 놀랍게도 너무나 논리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였다. 나 스스로 부족하게 느낀 설명을 듣고도 그렇게 영특하게 대답을 해내는 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나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것만큼 부족한 설명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 아이는 원래 독서를 많이 해서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어머니가 역사 강사이기 때문에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하게 설명했어도 자신의 능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논리적인 이야기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프릿츠 펄스의 게슈탈트 이론이 생각났다. 인간은 불충분한 정보를 얻을 때에도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는 아이디어다. 그렇다면 선생이 좀 부족해도 학생은 선생이 주는 단서를 기초로 해서 완전한 지식 또는 자기만의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니 선생이 완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을 때 나를 괴롭힌 것 중 하나는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가르치는 내용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 나 자신을 위선자처럼 느끼게 하였다. 오늘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교사의 역할이 초파리와 같다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이들을 자극하여 그들의 사고를 촉진하고 스스로 생각하게 할 수 있다면 완벽한 언설보다는 부족한 언설이 더 나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오늘은 가르침의 기쁨을 누린 복된 날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이들의 놀라운 잠재력을 확인한 기쁜 날이었다. 아침에 묵상했던 성경말씀이 떠오른다. 세례 요한을 보고 사람들이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라고 했다. 우리는 한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그래서 흥분되고 보람된 일이다. 그들이 조금씩 성장하는 것을 보는 일은 참 즐겁다. 아이들에게 고쳐야 할 부분이 발견될 때도 아이들이니까 변화될 기회가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갖게 된다. 나는 아이들이 정말로 좋은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자기들이 가진 재능을 마음껏 펼치면서도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그래서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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