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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24. 2019

낯섦에 대하여

일상을 벗어날 때 내가 얻는 것

  초등학교 때는 방학이 되면 늘 부산의 친가나 외가에 갔다. 친할머니 댁이든 외할머니 댁이든 상관없이 첫 밤을 지내고 일어난 아침이면 이상한 낯섦을 느꼈었다. 두 시간여 버스에 흔들리며 할머니 댁에 도착한 직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과 이모를 만나는 반가움만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날 아침에 느끼는 느낌은 독특했다. 우리 집에서 일어날 때와는 다른 빛과 다른 공기가 느껴졌었다. 집에서는 엄마가 깨우기 전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할머니 댁에서는 누가 깨우지 않아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옆에 이모가 자고 있어도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러한 낯섦과 고요함은 자유의 느낌과 닮아 있었다. 하루 종일 무엇을 하고 있어도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자유 말이다.     

  

  여동생이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담낭에 돌이 있어서 수술을 권유받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그 돌 중 하나가 담도로 미끄러져 내려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한 것이다. 급한 대로 돌을 제거하고 며칠 후 담낭을 제거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수업 듣는 것이 있어서 월요일마다 서울에 올라가던 터라 어제는 동생 옆에서 자고 오기로 했다.  


  동생은 언제나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 위주로 살아왔다. 일찍 혼자되신 시아버지를 삼 년 모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지성으로 돌보았다. 제부는 스트레스가 심한 직장에서 격무에 시달리느라 건강이 나쁠 대로 나빠졌다. 두 조카들은 제 길을 찾아가느라 많은 시간을 방황하면서 제 어머니를 노심초사하게 했다. 자주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동생의 기도는 늘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친정 부모님이 서울에 계실 때 부모님을 챙기는 것도 동생의 몫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착한 일을 하고도 자랑할 줄 몰랐던 동생은 늘 조용히 부모님을 섬겼다. 부모님이 작년에 대전에 내려오시면서 동생의 짐은 조금 덜어졌다.      


  수술 후에 동생은 통증을 많이 호소했다. 복강경 수술은 별로 아프지 않다는 말을 들었었기에 아플 거라는 예상을 하지 않아서였을까. 동생은 밤새 아파하고 잠을 자지 못했다. 수술을 끝낸 집도의는 담낭 벽이 두꺼워지고 사이즈가 커져 있었다고 말하며 닭 꼬치에 들어가는 닭 염통보다 세 배쯤 크고 붉은 조직을 제부와 나에게 보여주었다. 적출한 조직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커서 복강경이 통과하는 길을 억지로 넓히다 보니 상처부위가 커진 것 같았다.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기까지가 가장 통증이 심한 때다. 엉덩이에 진통제 주사를 맞고 아픔이 조금 줄었다고 했지만 밤새도록 아팠던 모양이었다. 종일 수업 듣느라 피곤했던 나는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도 코를 골고 잤지만 동생은 통증과 소음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병실 앞에는 공용화장실과 샤워실, 다용도실이 있어서 사람들 들락거리는 소리로 밤새 시끄러웠다.

 

  웬만하면 잘 참는 동생이 아파서 나를 불렀는데도 나는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호출벨로 간호사를 부르니 그녀는 호출기 너머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어디가 아프신데요!”라고 했다 한다. 복부 수술을 한 사람이 배가 아픈 것이 당연한데도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 물음에 동생은 기분이 나빴다고 한다. 야간 근무가 피곤했을 거라고 이해심을 발휘해보려 했지만 야간에 환자를 돌보는 것은 그들 직업의 핵심인데 그 일의 고단함에 대해 고객이 미안해하며 불친절한 서비스를 참을 일은 아니었다. 내 앞에서 그랬다면 한 소리 해주었을 테지만 지나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는 싫었다. 한 번만 더 그랬다간 병원 측에 컴플레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료인의 서비스는 신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뜻한 말로 환자의 마음까지 만져주어야 마땅하다.   


  수술 다음날이면 퇴원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이렇게 아파서 어떻게 퇴원을 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침에 회진 온 의사가 퇴원해도 된다고 말했고 집에 가면 잠이라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퇴원하기로 했다. 수술실에서 돌아온 지 17시간 만이었다. 내가 따라가 죽이라도 끓여주겠다고 했지만 동생은 거절했다. 동생과 제부를 보내고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왔다.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유성 터미널 근처였다. 수백 번도 더 지나다닌 이 길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겨우 하루 떠나 있었는데 그 사이에 가로수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 일주일은 여행하고 돌아온 것 같았다. 어렸을 때 할머니 댁에서 자고 일어났을 때 느낀 낯섦과 비슷했다. 터미널에서 우리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낯설었다. 이런 느낌이 좀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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