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라 Jan 30. 2024

시대의 부조리를 포착한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 시청 후기

    얼마 전 새로 시작한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를 보다가 기겁할만한 대사를 접했다. 여주인공 지원의 애인 민환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는 중에 여주인공을 일러 하는 말이 “그 여자는 결혼용이야.”였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상사가 여주인공에게 하는 말이 “자네 의견은 궁금하지 않아. 자네는 방긋방긋 웃고만 있으면 돼.” 

    작가는 의도적으로 극단적 남성우월주의자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들의 입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도록 한 것이리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썼다고 보는 근거는 그가 여주인공의 애인과 상사를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는 시청자의 입장이 극명하게 갈릴 것 같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했던 적이 있는 사람은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고(나도 그중 한 명이다), 그러한 행동을 일상적으로 하는 남성은 “그 말이 어때서?”라고 할 것이며, 일부 남성은 “나는 그 정도로 성평등 감수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야.”라고 자위할 것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남성은 민환과 상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볼 것이다.


    이 드라마는 애인에게 ‘결혼용’으로 이용만 당하여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여주인공이 암에 걸려 죽은 후 모종의 기적이 일어나 모두가 10년 전으로 회귀하는 이야기다. 그녀는 결혼 후 백수가 된 남편과 시모를 먹여 살리느라 병이 들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자신의 절친수민과 외도하고 있는 것을 죽기 직전에 알게 된다.

    10년 전으로 돌아간 지원은 민환과 결혼하지 않을 방도를 짜고, 수민을 남편과 결혼시켜 두 사람이 공멸하게 하려고 결심한다. 이 시점에서 민환의 그 발언이 나오는 것이다. 민환이 다른 여자들을 흘낏거리를 것을 본 민환의 친구가 “너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지원씨랑 결혼하려고 해?”라고 물었을 때 “그 여자는 결혼용이야. 착하잖아. 그리고 돈도 잘 벌잖아.”라고. 나는 이 대사가 남성 중심 사회의 고정관념을 보여주는 대표적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10년 전에는 그런 말이 통용되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24년 대한민국에는 20세기형 인간들과 21세기형 인간들이 공존하고 있다. 심지어 19세기형 인간들도 존재한다.

    상사의 말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1980년대에 나는 대졸 번역사원으로 입사했으나 과장님의 재떨이를 비우고 회의 때 커피를 뽑아오는 것은 당연히 ‘미쓰 리’의 몫이었다. 남자들로 가득한 자동차 회사에서 여상 출신 말고 대졸 여직원이 한 명 끼어있는 우리 과를 다른 과 남자들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우리 과의 꽃이었던 것이었고 나는 내가 꽃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해야 했다.

   박민경은 『사람이 사는 미술관』에서 “시대의 부조리를 포착한 어떤 그림은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상황을 변화하게 만든다.”라고 말한다. 내가 본 드라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남녀성역할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남성들에게 자기의 추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각성하게 하는 역할을. 먼저 각성하고 난 후에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각성까지 가는 길이 가깝지는 않으나 언뜻 보기엔 막장으로 보이는 드라마를 통해 각성을 이끌어내려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은 영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릉 사돈과 옥수수 범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