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장년 청춘문화공간 프로그램 수기 공모전 응시 원고
나의 큰사위는 손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다. 내 딸이 남편감을 고른 기준은 딱 두 가지였다. 잘 생기고 자상해야 한다는 것.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얼굴에 자상하기로는 대한민국에서 첫째가는 나의 아버지는 외손녀의 첫사랑이었다. 딸은 딱 외할아버지 같은 특성을 가진 남자를 찾아냈다. 아이는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생선 뼈를 발라주는 것에 반해서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사윗감은 강릉 최씨 성을 가진 총각이었다.
사위의 어머니는 처녀 적에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는데, 그 병원에 아이 낳으러 온 산모가 그녀를 자기 동생의 색싯감으로 점 찍었다. 이렇게 하여 강릉 노총각에게 시집온 경기도 처녀는 귀한 아들을 얻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단산했다. 사돈 부부는 당시만 해도 시골 중에 시골이었던 강릉에서 사교육 한번 없이 아들을 서울의 명문사립대로 보냈다.
피차 결혼 비용을 최소한으로 하기로 하여 우리는 사돈댁에 이불 한 채밖에 안 보냈는데, 사부인이 우리 집에도 이불을 보내주셨다. 본디 이불은 시집가는 색시가 보내는 것인데 어떤 의미로 주시는지 의아해하는 나에게 사부인은, “사돈은 아들이 없으니 앞으로도 이불 받으실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드리고 싶었어요.”라고 하셨다. 처음으로 혼주가 되어보는 나로서는 사부인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호사다마라고 딸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상선암에 걸렸는데 그때 사부인은 내 딸을 2박 3일 동안 간병해주셨다. 당시 나는 난치병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막내도 아직 어려서 딸의 간병을 어떻게 할지 난감해하던 차에 사부인이 간병인을 자처하셨던 것이다. 사부인은 이렇게 사람에게 진심을 기울이는 분이었다.
딸은 방사선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임신 소식을 전해왔다. 태아가 잘못되었을까 봐 걱정했던 몇 달이 지나고 딸은 무사히 손녀를 출산했다. 사장어른과 사부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이 귀한 집안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외손녀의 돌잔치를 겨우 몇 주 남겨놓고 사장어른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나는 사부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좋은 분이 이런 슬픔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몇 년이 흐르고 사부인은 옛 경험을 살려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하셨다. 심심하지 않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 아주 만족스럽다고 하셨다.
이번 컬처트립의 행선지가 강릉과 전주라는 것을 알고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참가를 결정했다. 혼자 계신 사부인을 언젠가 한 번 만나러 가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사부인을 만나기 위해 강릉을 방문했다고 하면 사부인이 이런저런 신경을 쓰실까 봐 조심스러웠다. 전화로 강릉 가는 길에 사부인을 잠깐 뵙고 싶다고 하니 기꺼이 시간을 내겠다고 하셨다.
이렇게 하여 사부인은 강릉 여행의 오후 시간을 우리 일행과 함께했다. 우리의 경유지였던 테라로사에서 그녀를 만나 강문 해변과 솔밭 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강릉에 가기 직전 사부인이 협심증 증상으로 응급실에 갔던 일은 딸을 통해 들었었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를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사부인의 배려 때문에 내 딸은 시어머니의 건강 상태를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부인이 지금까지도 갱년기 증상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부인과 비슷한 인생 경로를 지나는 사람이라 자식들보다는 편하게 말씀해주신 것 같았다. 불편한 노인들 돌보는 일을 하고 있으니 본인이 아픈 것을 말할 처지가 못 되는 데다가, 아플 때 아프다고 호소도 하고 의논도 할 수 있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 그녀를 더 힘들게 하였으리라.
혼자 있는 시간에 갑자기 심장이 조여와서 119에 전화를 해야 하나 고민했던 일, 결국 응급실에 갔는데 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당황했던 일, 응급실에서 집에 올 때 택시를 탔는데 정신이 없어서 아들 명의로 된 카드를 쓰는 바람에 아들이 알게 되어 후회했다는 이야기 등을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잘하셨다, 아들이 당연히 알아야 한다며 사부인을 위로했다. 사위의 성화로 사부인은 서울 A병원에서 심혈관 정밀검사를 받기로 예약이 되었는데 그 날짜를 이틀 앞두고 우리 여행팀이 강릉에 간 것이었다.
사부인은 내게 미역국을 사주고 싶어하셨다. 이틀 후가 내 생일이라는 것을 사위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우리 일행의 저녁 식사 메뉴 중에도 우럭미역국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나는 뻔뻔하게 “잘됐네요. 나랏돈으로 먹는 거니까 같이 드세요.” 하면서 사부인을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것 중에 처음 보는 음식이 있었다. 여행을 다녀보면 지역마다 특이한 나물이나 밑반찬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는데 커다란 율무처럼 생긴 이 음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돈은 그것이 옥수수 범벅이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자세히 보니 끈적끈적한 식감의 그 음식은 껍질 깐 옥수수로 만든 것이었다. 맛이 달착지근하여 자꾸 손이 갔다. 옥수수 낟알 껍질을 어떻게 까는지가 궁금해서 사부인에게 물으니 “제가 보내 드릴게요.” 하셨다. 보내달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사돈은 자신이 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며 옥수수를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안 그래도 매년 생옥수수를 보내주시는 바람에 친정엄마와 우리 집의 냉동실이 꽉꽉 차서 제발 그만 보내시라고 부탁드린 것인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껍질 깐 옥수수를 받게 생겼다.
사돈은 그다음 날로 옥수수를 부쳐주셨다. 나는 인터넷에서 조리법을 검색하여 옥수수를 불렸다가 압력솥에서 20분을 삶고, 팥은 따로 삶았다. 그리고 두 가지를 섞어서 소금과 인공감미료로 간을 맞췄다. 옥수수는 생각보다 무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그 정도로 삶았는데도 식감이 식당에서 먹었던 것만큼 부드럽지가 않았다. 그래도 비주얼은 비슷하게 보여서 사진을 찍어 사돈에게 보냈다. 사돈 덕에 새 요리에 입문하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이 옥수수 범벅을 팔순 맞은 나의 삼촌 댁을 방문할 때도 가져가고, 몸이 아파서 컬처트립에 함께하지 못한 독서 회원 병문안 갈 때도 가져가고, 우리 부부의 간단한 아침 식사로도 먹었다.
컬처트립에 참가한 덕분에 7년 만에 사돈을 만났고, 그녀와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알게 된 옥수수 범벅이 또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의 지인들에게까지 그 맛이 전해졌다. 무엇보다도 옥수수 범벅을 전할 때마다 사돈과 나의 이야기도 함께 전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사부인의 고운 마음씨가 사람들을 감동시키듯 하늘도 감동시켜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지내시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들의 공동 손녀가 중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반려자를 만나는 것까지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