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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n 01. 2024

2010년 일기의 시작

    다이어리 본문은 1월 16일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일기를 쓰기 전에 이 기록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세 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다.

    첫째, 혹시나 내가 수년 내에 죽게 될 때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을 막내를 위해 쓴다. 엄마의 체취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둘째, 남편과 큰딸, 둘째 딸, 양가 부모님, 형제들에게 나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서 쓴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을 그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셋째, 다행히 병을 극복하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을 때 이 소중한 체험을 망각하기 위해 쓴다.

    다이어리에 쓰인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2010년 1월 16일 확진받기 하루 전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는 물질적인 자아가 실존하는지 여부일까? 만약 내가 1년 후에 신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치면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마흔에 죽은 내 친구 Y의 존재는 나에게 그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운동장에서 별이 둥글다는 내게 별은 별 모양이라고 우겼던 그녀,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달려들어 환영해주었던 스피츠들, 처음 맛보았던 간식거리들, 10대와 20대 때 찬란하게 빛났던 그녀의 아름다움, 30대에 다시 만난 후 나를 사랑하고 의지했던 그녀의 부드러운 성품, 몇 명의 남자에게 상처받았던 그녀의 마음, 맹목적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녀의 아들, 이런 기억의 조각들이 Y다.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눈을 감으면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독특한 억양과 꾸미지 않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천국에 가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을까? 정말로 천국이 있을까? “좋은 곳에 갔을 거야.”라는 말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닐까?

    오늘 밤을 꼬박 새운다. 내일의 선고를 나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2010년 1월 17일 확진 받은 날

    L 교수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역력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지 못하여 미안해하는 마음.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불치의 병도 손실만은 아니다.

    H는 어제 통화에서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펼쳐놓고는 자기 혼자 심란하였나 보다. 잠을 못 잤다고 했다. 나를 위해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2010년 1월 19일 여전히 C 병원

    어젯밤엔 병실이 방문객으로 가득 찼다. 남편이 1인실을 고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지인들끼리 서로를 즐거워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K 집사님은 벌써 몇 번째 병실을 찾아주셨다. 목소리로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 매력이 넘쳤던 여인. 여자인 나마저 소유욕을 갖고 싶게 만드는 그녀. 그녀가 나의 친언니라면, 나만의 언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지금 그녀는 나에게 너무 큰 사랑을 주고 있다. 내가 많이 아플까 봐, 두려운 결과가 나올까 봐 울어 주신다.

    7년 전 다리 부상을 입어 입원했을 때 Y 집사를 포함한 여러 명의 교인들에게 받았던 사랑을 지금은 K 집사님께 받고 있다. 그때 참 행복했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난 그때부터 병원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나의 유아적 소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리라.  

    H 집사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문 집사님과 이 집사님이 없으니 교회가 텅 빈 것 같아요”라고. 그분이 나를 아는지도 잘 몰랐는데. 그렇게 우리를 소중히 여겨 주셨구나 생각되어 감사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몇 해 전 상처한 분이었다. 나를 보고 자신의 아내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때 나를 걱정해주던 H 집사님은 코로나 시국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진심을 다해 나를 염려하고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그분들이 정말 고맙게 느껴진다. 나는 꼭 이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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