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초 코로나-19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모종의 위안을 얻었다. 그보다 10년 전 혈액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느꼈었는데 이번에는 온세상사람들에게 동지애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전염성 질병인 반면 나의 병은 비전염성이고 원인불명이었으므로 코로나를 사회적인 병, 나의 병을 개인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병은 희귀난치병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그 병의 이름은 다발성골수종이었다.
투병 중에 위안이 되었던 것 중 하나는 같은 병을 앓는 선후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같은 이름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 그 병을 앓았던 사람은커녕 그 병명을 아는 사람도 내 주위엔 없었다. 인간을 불안에 떨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무지 때문이고 그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문명으로 발전했다는 말을 누군가 했었다. 다양한 혈액암 치료 사례가 많고 조혈모세포 은행도 있는 서울 S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을 때 나는 담당 의사에 대한 신뢰감 외에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다발성골수종 환자들을 만날 수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이제 막 확진을 받은 입장이었으므로 진료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보다 병이 더 진전된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환자는 피부가 흙색이었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모자는 머리칼을 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마스크는 항암치료 중 감염 위험을 피하고 병색 완연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였으리라.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도 겁이 나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되면 어쩌지’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가야할 길을 먼저 걸어가는 선배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의지할 사람들이 생긴 것 같았다. 무조건 걱정하고 슬퍼하는 가족이나 지인들보다는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있는 그들이 믿음직스러웠다.
나의 상태는 처음에는 급성이었다가 치료를 시작하면서 호전되었지만, 항암제를 투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후유증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 계속 입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우리 집과 친정집에서의 생활과 입원생활을 교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입원실에 휴대폰 반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PC는 비치되어 있었다. 나는 PC로 다발성골수종 환우회 커뮤니티를 찾아서 가입했다. 얼굴도 모르는 환우들(또는 환자 가족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커뮤니티에 공유하고 있었다. 확진 받은 날짜, 받은 검사의 종류, 처방받은 약의 이름, 병의 증상, 앞으로의 치료 일정 같은 것을 꼼꼼하게 올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환자 자신보다는 가족들이 올려주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나는 이들이 환자를 간병하는 와중에 이런 기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시간이 지난 후 투병이나 간병 생활을 회고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글쓰기를 기도나 의식의 일종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원하거나 타인의 위로나 응원을 기대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상태를 공유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을 읽는 데 급급했다.
신입환자인 나는 환자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 세계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따라서 관심도 없었던 세계였다. 건강했을 때는 그런 세계를 알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꼭 알아야하는 세계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공유한 기록들을 열고 그 속에 담긴 정보를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빨아들였다. 나는 지금도 그들에게 커다란 고마움을 느낀다. 순전히 이타적인 동기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나처럼 불안에 떠는 환자들에게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남긴 글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칠흑 같은 밤에 낯선 길을 가는 여행자였고 그들의 글은 서툴게 그린 지도이자 저만치 앞에서 깜박이는 작은 등불이었다. 지도나 등불이 있다고 해서 돌밭이 평지가 되지는 않지만 쉬어갈 수 있는 넓은 바위가 언제쯤 나올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진료를 기다리던 복도와 비슷한 병원 복도 장면
나의 모험은 그렇게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같은 골짜기를 여행하는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하는 여정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진단 받은 순간에 느꼈던 막연한 불안감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