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 브뤼크네르의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을 읽고
10년 만의 장거리 비행이다. 이번엔 독서를 자제하고 글쓰기를 하고 싶어서 집을 나올 때는 쪽 성경 하나만 챙겼다. 이번 여행의 주제가 바울의 선교여행지 탐방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이 이번 여행의 본문이기 때문이니 틈틈히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결국 탑승 직전에 한 권을 사고 말았다. 12시간이나 기내에 갇혀 있는 동안 남이 쓴 글 하나도 못 보면 금단증상이 올까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탑승구 근처에 있는 서점에서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이라는 책을 샀다. 그의 전작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만 3년을 끌어온 팬데믹의 영향을 작가는 몇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제 바깥세상은 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온 세상을 집안으로 데려온 덕분에 우리는 바깥세상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화면은 화면일 뿐입니다. 빗장을 걸고 집에만 쳐 박혀 산다면 안전을 위해 죽음과도 같은 권태를 대가로 치르는 셈이지요. 먼 곳을 내다볼 수 없는 초저공비행 같은 삶은 감옥 생활, 늘어진 속도의 삶입니다. 이런 류의 정신적 댄디즘은 시간과 세월의 흐름 외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게끔 주도면밀하게 애를 씁니다.”
그렇다. 팬데믹은 우리를 협소한 공간에 가두고 사람의 온기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체질적으로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더 편했으므로 나는 합법적으로 유폐의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삼 년의 자유(내게는 늘 홀로 있음의 자유가 부족했으므로 이 시간의 성격은 고립이라기보다는 자유였다)는 나를 기이한 인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반 곤자르프의 소설 『오블로모프』에서 충격적인 문장을 인용한다.
“남은 생이라는 널찍한 관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는 그 속에 편안하게 누워서 끝을 향해 한다.”
오블로모프는 무기력증에 빠져 종일 집에만 있다. 그가 잠옷과 슬리퍼 차림으로 하는 일이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뿐이다. 생각하는 일에 지치면 “오늘도 공공의 선을 위해 애를 쓸 만큼 썼다.”고 합리화한다. 내가 오블로모프처럼 집에만 처박혀서 연애도 일도 두려워하는 정도로 무기력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책 읽고 글 쓰는 것이니 그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싶다.
평생 글을 쓰고 강의를 한 저자와 나를 비교할 순 없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바로 이런 것이었으므로 나는 이 책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인류가 공유한 경험을 몇 마디 말로 정리하는 것. 브뤼크네르는 이 여행에서 나의 원격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직 살아있으므로. 프랑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