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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Aug 18. 2024

나에게 소설이 의미하는 것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독후감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장을 읽으면서 나는 왜 내가 소설가가 되지 못하는지(또는 못했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나는 소설가가 되기에는 성미가 급한 것이다. 이 사실은 나의 열등감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었다. 스토리를 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식을 통해 에둘러 말하기에는, 나의 참을성이 부족한 것이다. 나는 얼른 결론을 말하고 싶어 미치는 타입이다.    

     말을 할 때도 나는 경제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최소한의 단어로 최대한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 반면 최대한의 단어로 최소한의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친구 중 하나가 그런 유형이었다. 나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이 친구는 왜 이렇게 길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성가심이기도 하고 신기함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에게 중요했던 것은 모종의 정보 전달이 아니라 자신이 말을 하고 내가 듣는 그 시간 동안 우리 둘 사이에 일어나는 내적 역동, 요즘 말로 하면 티키타카였다. 그래서 이제는 그 친구의 말하는 방식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 그 친구는 세상에 없다. 나보다는 그 친구에게 소설가적인 자질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동안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가 명확해진다. 나는 서른 살 무렵부터 삼십 년 동안 (이렇게 쓰고 보니 엄청난 시간이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 소설의 쓸모를 몰랐다.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지루했다. 그런데 수북수북 모임을 하면서 장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소설에 푹 빠졌다. 이는 내가 ‘인생은 한두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리상담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면서 나는 인간의 본성과 욕구, 문제와 해결책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내 성격에 딱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문제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진다는 데 있었다. 인간을 보는 서너 가지 관점을 배웠을 때는 그 서너 가지 이론으로 인간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러 이론가들의 이론이 상충할 때는 그 이론들을 나의 사고 속에서 절충하고 통합해야만 했는데,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른 이론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심리상담 이론은 시대와 사회라는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었다. 인간은 진공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므로 어떤 시대적, 지역적 배경에서 이런 이론이 나왔는지 알아야 지금 내 앞에 있는 내담자에게 적합한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건만, 나는 권위있는 이론가의 말씀이나 실천가의 사례에 기대어 퍼즐 맞추기식 상담을 해나갔다. 특정 내담자에게 맞는 특정 이론을 찾는 것 자체도 흥미롭기는 했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 겨우 200년 된 현대심리학이라는 도구만으로는 복잡한 현대인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심리학의 한계 인식과 소설 읽기 실천이 합세하여 나는 드디어 인간 문제를 해결 데 있어 소설의 쓸모를 알게 되었다. 소설의 쓸모는 역사의 쓸모와 같은 듯 다르다. 역사의 쓸모를 쓴 최태성은 ‘역사는 삶이라는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설서’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을 소설에 적용해본다면, ‘소설은 삶이라는 문제를 묘사한 세밀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인류의 역사나 개인의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대신 구체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사실성과 개연성을 획득하는 예술 장르다. 그래서 역사서에 몰입하지 못하는 사람도 소설책에는 몰입할 수 있다.          

소설은 삶이라는 문제를 묘사한 세밀화다

    그래서 소설의 쓸모를 내 방식대로 다시 정의해본다면, 소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 보면 삶의 진실에 접근하게 해주는 도구’다. 다른 말로 하면 ‘오락인 줄 알았는데 철학’인 장르다. 물론 잘 쓰인 소설에 한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하루키를 비롯하여 메르시어, 김훈, 하재영, 김영하의 작품이 잘 쓰인 소설이라는 것은 그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가 꾸준히, 엄청나게 많은 수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독자들은 딱히 설명하진 못해도 그 속에 진리가 포함된 이야기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그리하여 독자의 정의를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좋은 독자란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사람’이라고.       

좋은 독자란 좋은 작가를 알아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심리상담가로서 나에게 소설이 가지는 의미가 무어란 말인가? 나는 소설을 통해 심리학 이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인류의 역사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내담자들도 소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담자들에게 소설을 권하고 그들과 함께 소설을 읽는다.      


    하루키의 글을 통해 나는 ‘소설가’라는 진로 선택지를 버리게 되었지만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기분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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