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쓰기에 꽂힌 것이 언제부터인가 곰곰 생각해보았다. 글쓰기를 배워야겠다고 작정하고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은 교회 문화센터였다. 작년 가을에 개설되었던 이 수업에서는 주어진 시간 내에 주어진 테마에 맞추어 짧은 글들을 써내는 연습을 했었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잘 듣는 나는 가장 열성적인 학생이었다. 금년 봄 대학교 평생교육센터에서도 글쓰기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때는 시의 특성인 비유와 상징에 대해 배우면서 그런 기법들을 내 문장에 녹여 넣는 것을 연습해 보았다.
계속해서 글쓰기를 배우고 싶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나는 '작가 탄생 프로젝트'라는 광고를 인터넷에서 보았을 때 마음이 강하게 끌렸다. "모든 국민은 작가다."라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부제였다. 나를 초청하는 이 문구를 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뜨거운 여름 한 달 동안 전주에서 수업을 들으며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썼다. 나를 포함하여 이 프로젝트에 참석한 40명의 사람들에게 이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이 수업에서 글을 잘 쓰라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저 '당신도 쓸 수 있다, 당신은 써야 한다'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나만의 경험과 나만의 생각이 가장 귀중한 글감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채찍이 되어 나는 신나게 자판을 두드렸다. 글 쓰는 시간이 책 읽는 시간보다 훨씬 더 즐거운 것을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쓰기를 열망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 글쓰기에 목말랐던 것일까? 내가 글쓰기 강좌에 등록한 것은 작년 가을 부모님이 우리 동네로의 이사를 결정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막연한 불안이 일었었다.
20여 년 전 부모님이 대전에 몇 년 사셨을 때 나는 과민성 대장염으로 고생했었다. 결혼 전이나 후나 내 인생에서 부모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무언의 율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결혼 후에 나는 부모님과 남편의 요구 사이에 끼어 줄다리기를 했다. 양쪽을 다 만족시키는 것은 정말이지 힘들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간 해오던 관성 때문에 중단할 수 없었고 남편은 뭐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부터 내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양측의 요구가 공존할 수 없는 경우에는 내 마음도 나뉘었다. 내 정신이 완전히 분열되기 전에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가셨고 나는 남편과의 관계만 신경 쓰면 되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었다.
이번에 부모님이 가까이 오시면 매일 부모님께 불려 다닐 가능성이 있었다. 늙어버린 아버지는 파킨슨과 치매를 앓고 계셨기 때문에 부모님의 부름을 거절할 수 있는 합법적인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서울에 사실 때 부모님은 요양보호사와 간병인, 가사도우미는 남이라서 싫다며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나와 여동생을 불러 올리셨다. 이제는 가까이 오셨으니 오롯이 나만 불러댈 가능성이 있었다. 바쁜 척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럴듯한 방패막이가 필요했다. 부모님으로부터의 도피처가 필요했다고 하면 너무 지나친 표현일까? 엄청나게 바쁜 일도 없으면서 부모님의 부름을 거절하기에는 내 담력이 너무 작았다.
그 도피처가 왜 다른 것이 아닌 글쓰기였을까?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면서도 합당한 이유가 없이는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글쓰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심각할 정도의 겁쟁이였다. “난 글을 쓸 거야, 작가가 되고 싶어”라는 말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건 뜬금없게 들릴 것이 분명했다.
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써야 한다든가 학술지에 논문을 실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 때는 솔직히 쓰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었다. 그 행위를 누구에게 변명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하니 핑계가 필요했다. “연금공단에서 공짜로 글쓰기를 가르쳐 준다고 해서” 라든가 “우연히 글쓰기 수업에 다니게 되어서”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 남편이든 부모든 군소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글쓰기 수업을 들어야 해서 바쁘고 그 때문에 부모의 요구에 다 응할 수 없다.’라는 것이 공식적인 내 입장이 되었다. 사실은 부모에게서 도망하고 싶은 마음과 글을 쓰고 싶은 마음 둘 다를 감출 핑계를 찾아낸 것이다. 부모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벌기 위해 바쁠 필요가 있었고 그 바쁨에 대한 합법적인 이유를 제공해준 것이 글쓰기였다. 내 머릿속은 그렇게 복잡했다.
글쓰기에 대한 나의 은밀한 욕망은 언제부터 자라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내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꼭 10년 전에 나는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았고 그해 7월에 자가골수이식을 했다. 다행히 경과가 좋았으나 회복기에 접어들면서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었다. 3년 정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간신히 회복되었다. 그 일로 나의 가치관은 완전히 바뀌었다.
죽음이라는 친구가 나에게 인생의 유한성을 실감하게 해 준 덕분에 내가 이 세상에 남길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나만의 깨달음, 나만의 사상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증언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굳이 다른 사람의 입을 의지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입으로 하는 말이 가장 나다운 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으리라.
4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장원을 했다. 쓰기 싫은 글짓기를 가까스로 완성해서 제출했는데 장원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 후 학교 대표로 시(市) 대회에도 나갔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어쩌다 한 번 글의 요정이 나를 도왔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는 일기를 꾸준히 썼고 전학 간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일기와 편지 쓰기를 통해 내 마음을 글에 담는 것이 점점 편해졌고 다른 식으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말보다 글이 편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어려서는 말을 더듬어서 늘 엄마에게 지적을 받았다. 그 지적 덕에 나는 더 심하게 더듬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긴장되는 순간에는 말을 잘 더듬는다. 그러니 나를 표현하는 방법은 글밖에 남지 않았던 거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나의 비겁함이 새삼 부각된다. 비겁해서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또 기가 죽는다. 비겁한 자에게도 글쓰기라는 자기표현방법이 있으니 다행이긴 하다. 말하기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글로는 쓸 수 있으니 말이다. 겨우겨우 쓰기는 하였으나 나의 글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정말 두렵다. 결국 나는 겁쟁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 셈인데 내가 겁쟁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또 나를 주눅 들게 한다. 유일한 변명은 나와 비슷한 겁쟁이가 이 글을 읽으면 동지를 만난 듯 반가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