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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16. 2019

목격자로서의 글쓰기

글쓰기의 이유

  삼십 년 가까이 치유적 독서모임을 해 왔다. 우리 모임에서 책은 그 자체로서 심리교육적 가치를 갖는 동시에 회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촉진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독서모임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대단히 흥분되는 경험이다. 먼저는 책이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 다음에는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거울이 된다. 책을 매개로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는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되는 동시에 타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렇게 우리 독서모임은 강요되지 않은 배움의 공간이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작가들과 번역자들과 출판인, 그리고 서점 운영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늘 있었다. 나도 그런 일 중 하나에 참여할 수 있으면 큰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이  가지 중에서 가장 높은 벽은 글쓰기라고 생각해왔다. 작가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선택받은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글쓰기 욕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을 때도 스스로 부적격자라고 생각하여 글은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지, 욕심을 버리자, 독서나 열심히 하자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금년 한 해 이런저런 이유로 독서모임을 쉬기로 하면서 오히려 나의 독서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독서모임에서는 주로 심리학과 영성적 관점에서 쓰인 도서를 읽어왔기 때문에 도서 선정자로서 나는 우리 모임에 적합한 책을 찾느라 늘 고심했다. 이제는 그런 책임에서 벗어나 마음 가는 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문학책과 사회과학책들을 마음 놓고 읽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독서를 하는 과정에서도 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때마다 솔깃해서 들었다.

 

  박경리 작가는 ‘글쓰기가 아니었으면 어려운 시절을 헤쳐 나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그 말을 라디오에서 듣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글쓰기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데 그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힘을 줄 수가 있었을까? 나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글쓰기에 대한 책들을 한 권 두 권 읽기 시작했다.


  ‘노인과 바다’를 탈고하기까지 육백 번을 고쳐 썼다는 헤밍웨이의 에피소드를 듣고는 작가들이 영감을 받아 단숨에 글을 써 내려갈 거라는 나의 편견이 깨졌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쓴 원국 작가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나만의 이야기를 하라며 그런 이야기에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글을 쓴다 해도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내게 최 작가의 말은 나도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리베카 솔닛과 앤 라모트의 책을 만난 것도 큰 축복이었다. 솔닛은 글을 쓰면서 자기 목소리를 얻었다고 말했는데 내 목소리가 모기소리만 하다고 느껴온 나였기에 나도 남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라모트는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고 글을 쓰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글쓰기의 장벽을 완전히 없애주었다. 이런 작가들의 격려에 힘입어 나는 카카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독자들의 작은 반응들을 확인할 때마다 글쓰기의 즐거움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오늘은 줄리아 카메론의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를 읽는 중에 글쓰기에 대한 특별한 은유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존재를 잃고 실의에 빠진 친구에게 글을 써보도록 권하면서 그녀는, 그 친구에게 목격자가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글쓰기를 목격자라고 표현한 이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글은 결국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써지는 것이므로 그 글을 읽어주는 독자는 목격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글쓰기 자체를 목격자라고 불렀을 때 카메론이 의미했던 것은 ‘또 다른 자아’였다. 그녀는 ‘아파하는 나’와 ‘글을 쓰는 나’를 분리해서 사고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자아는 아파하는 자아를 너무나 잘 아는 존재이므로 전자는 후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이웃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이므로 자기가 자기에게 목격자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카메론이 말하는 목격자는 아파하는 자를 지켜봐 주며 그 마음을 알아주는 자이다. 동시에 아파하는 자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지혜로운 자아이기도 하다.

 

  아무도 내 상처를 보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상처의 아픔에 더하여 외로움의 고통까지 느껴야 한다. 누가 나의 상처를 보아주고 알아주고 함께 아파해주면 나는 아파할 권리를 얻었기에 충분히 아파할 수 있다. 미국 어느 지역에는 부모 중 한 명을 사별한 아이들만을 모아 한 학급을 운영하는 초등학교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제 한 지인에게 들었다. 그 학급의 수업 주제는 슬픔이라고 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의 감정을 느낄 권리를 아이들에게 주고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며 그 주제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아이디어에서 나온 결정일 것이다. 감정의 억압으로 인해 온갖 신경증이 생긴다는 것이 상식이 되었지만 그러한 지식을 기반으로 감정의 수용과 표현을 격려하는 기관이나 가정의 예를 본 적이 없었다. 학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가정과 종교기관은 더더욱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카메론 식으로 말하자면 나의 글쓰기는 이미 나의 목격자가 되어주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외롭지 않으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문장들은 때로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 요즘은 이렇게 좋은 글쓰기를 우리 독서모임 회원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전주 작가 탄생 프로젝트를 통해 ‘같이 쓰기’를 경험해 본 나는, 글을 같이 쓰고 쓴 글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의 목격자가 되어주는 그런 모임을 새롭게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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