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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23. 2024

김수영에서 한강까지

김수영의 시와 산문을 읽고

민음사의 '디 에센셜' 시리즈 중 김수영 편을 읽었다. 책을 통해 나는 연극과 문학사랑했던 소년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의 격랑 속에서 서울, 일본, 만주를 거쳐가며 결국 인민군 포로신세로 전락한 과정을 보면서 시대가 인간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렸다. 시대는 온실 화초 같은 김수영을 거친 잡초 같은 존재변모시켰다. 그래서 그는 남은 생애 내내 자신과 싸우고 아내와 싸우고 세상과 싸웠다. 버스에 치여 죽지 않았어도 그는 자기 분치여 죽었을 것이다.     


김수영의 시론과 시인론은 한강 작가를 떠올리게 했다. <책형대에 걸린 시>라는 산문에서 김수영은 4‧26(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낸 시위 사건) 이후 '산문의 자유(시대적‧사회적 여백)'가 생겼으니 이제 시인들은 새로운 시를 써야 한다고,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모험적 기도’를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4‧26 이후 64년이 흐른 지금도 '산문의 자유'는 완전해지지 않았다. 한강을 역사왜곡자라 주장하며 노벨상을 탈 자격이 없다고 시위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채식주의자』에서 개인의 개인에 대한 폭력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한강은, 역사적 진실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주제를 확대하여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폭력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썼다. 나는 그녀의 글쓰기 과정을 지켜보지 못했으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소설가인 화자가 ‘그 도시의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가족이 떠나고 자신은 거의 폐인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이것이 한강 자신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이 대체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계속 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이유는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글쓰기의 고통은 별것 아니라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슬픔이 묻히면 또 다른 슬픔이 태어난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광주와 제주에서의 ‘피해 호소인’들은 자신들의 진술을 거짓말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2차, 3차 가해를 당했다. 광주에서 태어났고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열 살이었던 한강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말하는 책무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겸허히, 그러나 무겁게 받아들인 것이다.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앤더스 올슨 노벨 위원회 위원장은 한강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섰다”고 말했다. 그의 판단이 정확하다면 역사적 오류와 보이지 않는 규칙에 맞섰던 한강은, 김수영의 표현대로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간' 사람이다. 그녀의 작품은 폭력과 그 결과인 육체의 고통에 대한 극사실주의적 묘사로 인해 독자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는데, 작가 자신은 그것이 의도된 일이었다고 말한다. 소설을 통해 위안을 받으려는 사람들,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사람들을 한강은 배신한다. 진실은 때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한강의 수상에 힘입어 많은 사람이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많은 작가가 사실에 근거하여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광주와 제주의 사연이 ‘기정사실’이 되고 이 땅 위에서 죄없이 피 흘린 사람들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작가들은 은폐된 또 다른 사실들에 대해 불편한 이야기를 써야 할 것이다.

5‧18과 4‧3사건에서 무고하게 죽어간 피해자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그들을 폭도라 규정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히틀러가 유태인들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세계인이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정사실이 된 역사적 사건이 그 당시에는 믿을 수 없는 일로 취급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현대사는 아직도 써지는 중이며 이미 써진 부분도 계속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가 충실하게 써지기 위해서는 김수영과 같은 시인, 한강과 같은 소설가들의 활약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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