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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주; 이어붙인 가족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by 이소라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가장을 잃은 두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두 가족의 아이들인 소라, 나나, 나기가 주인공이다.

가장을 잃었다는 점 말고는 두 가족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소라와 나나의 엄마인 애자는 남편의 사랑에 기대 살던 사람으로, 남편을 잃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두 딸의 존재도 그녀가 살아갈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이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엄마를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애자는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를 망가뜨리고."

남편이 죽은 후 가재도구를 싹 다 버리고 와서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집에서 살던 애자네와 달리 반 지하 집 반대편에 살던 순자씨의 집에는 소리가 있고 온기가 있다. 순자씨는 남편이 죽었어도 남편이 일하던 그 시장에서 묵묵히 과일 장사를 한다. 아들 나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기는 엄마 없는 집에서 심심하게 지내다가 소라와 나나 자매가 옆집으로 이사 와서 신이 난다. 유령 같은 애자가 딸들을 방치하는 것을 본 순자씨는 소라와 나나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싸준다. 어린 아이였던 소라와 나나는 새벽에 일 나가기 전에 도시락을 세 개나 싼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몰랐다가 어른이 되고서야 알게 된다.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 6년을 순자씨의 도시락을 먹고 큰 소라와 나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나기네와 한 가족처럼 지낸다. 자매는 지금도 툭하면 순자씨의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가을에는 두 가족이 함께 김장을 담그고 여름에는 함께 만두를 빚는다.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거의 비밀이 없다. 나나는 나기가 동성애자인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다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이야기는 전환점을 맞는다.


나나의 연인인 모세는 가부장적인 가정의 외동아들이다. 나나는 아버지의 권위만 있고 대화가 없는 그 가정의 분위기가 질식할 것처럼 답답하다. 열 살 때부터 부모 없이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인 나나는 온전한 가족을 이루고 살았다는 모세의 가정이 자기 집보다 더 이상하다고 느낀다. 모세는 아버지의 고압적 행동과 어머니의 순응에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을 문제시하는 나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긴다. 현대식 아파트에 살면서 요강에 배변을 하는 모세의 아버지와 그 요강을 비우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다.


“모세씨는 궁금한 적 없었나요. 아버지는 왜 요강을 남의 손으로 비울까, 어머니는 왜 남의 요강을 비울까.”

“남이라뇨, 남이라고 할 수 있나. 가족인데.”

“가족은 남이 아닌가요?”

“남이 아니죠.”


남이 아닌 가족이란 무엇인가?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더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하게 여길 필요도 없는 존재들인가? 하지만 나나에게는 애자도, 소라도, 나기도 가족인 동시에 남이었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남은 아플 수 있다’고 할 때의 그 ‘남’이었다. 가족이 되면 서로에 대해 자동으로 다 알아지는 것이 아닌데 그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어떤 호기심도 의문도 갖지 말아야 된다면 나나는 그런 가족은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또는 ‘좋은 가족은 어떤 가족인가’ 하는 것이다. 소설 안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면 가족이란 ‘서로 좋아하고 서로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남들의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남이란 개념은 심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존중을 말하는 것이다.

남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는 순자씨다. 순자씨는 애자의 가족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을 때부터 소라와 나나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녀의 관심은 무심함이라는 외피 속에 감추어져 있다. 6년 동안 소박한 도시락 세 개를 신발장에 툭 얹어놓음으로써 소라와 나나의 뼈를 기른다.

23169379.jpg 순자씨는 아침마다 소박한 도시락 3개를 신발장에 얹어놓았다

순자와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자매의 어머니인 애자다. 애자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을, 그것이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도 불쌍히 여길만한 여유가 없다. 심지어 나나가 임신한 것을 알고 딸의 행복을 질투하기까지 한다. “왜 너희만 행복해지려고 하니?”라 말하며. 그녀는 자신이 불행한 만큼 온 세상이 불행해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고아로 자라 늘 사랑에 목말라하다가 비로소 남편의 사랑으로 갈증을 채웠던 애자더러 그 남편이 사라진 마당에 타인을 연민하라고 하는 것은 가혹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멈춘 곳에는 생명이 멈춘다. 사랑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부터 죽어간다. 애자에게서 사랑을 공급받지 못한 두 딸은 엄마 대신 다른 근원에서 사랑을 구해야 했다. 순자씨 같은 이웃을 만났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소라와 나나 역시 애자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순자씨에게서 볼 수 있듯 타인에 대한 연민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타인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살린다. 순자씨는 본인이 낳은 아들 외에 두 딸을 얻었고 곧 손자도 얻을 것이니 그녀의 노년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의 인격을 말할 때 우리는 그의 등 뒤에서 찬란히 빛나는 후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를 본다. 순자씨는 그런 사람이었다. 타인이 행복한 웃음을 웃게 하는 사람.

순자씨의 성품을 닮은 나기는 소라와 나나를 단지 불쌍히 여긴 것만이 아니고 그들이 바른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그래서 아무런 가책 없이 금붕어를 괴롭히는 나나에게, 뺨을 때려줌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한다. ‘내가 아프지 않아도 너는 아플 수 있고, 나는 아파도 너는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역지사지의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라고 말하며. 나기 오라버니의 가르침을 받은 나나는 내내 원망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던 백모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녀를 연민할 수 있게 된다. ‘자식을 잃는 압도적인 고통’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가족 모두가 살아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며, 가족 중 누군가가 일찍 죽었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누구라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죽음은 불가피하다. 가족의 죽음 후에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남아있는 자들의 숙제다.


한편 나기의 사랑은 안타깝다. 그토록 좋은 사람인 나기가 자기학대적인 사랑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기는 나나까지 그런 사랑을 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나나가 정상적이되 건강하지 못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는 비정상이되 건강한 가족을 이루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나의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었다.

소라와 나나, 나기와 순자씨는 콜라주처럼 이어붙인 가족이지만 그 어느 가족보다도 더 온전한 가족이다.

“콜라주는 … 서로 다른 두 가지가 대면하거나 스며들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 차이가 어떻게 새롭고 온전한 전체를 낳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예술이다.” -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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