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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클레어 키건의『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by 이소라

윌리엄 펄롱은 사생아로 태어났으나 어머니의 고용주였던 노부인 덕에 비교적 안정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단란한 가정을 꾸린 가장이다. 편히 앉아 밥 먹을 새도 없이 바쁘게 일하며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을 부양하는 그는 자신의 삶이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씩 이게 다가 아닐지 모른다는 느낌이 찾아오면 안절부절못한다.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간 그는 석탄 창고에 갇혀 있는 어린 소녀 세라를 발견하고 수녀원장에게 데려다준 후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아이는 ‘걔들’이 자기를 석탄광에 가두었다고 말했지만 진실여부는 알 수 없다.

수녀원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정원과 완벽하게 깨끗한 실내장식을 자랑하는 성스러운 장소이지만, 그 뒤에는 추악한 진실을 감추고 있다. 이곳은 마을의 소중한 딸들에게 엘리트 교육을 제공하는 동시에, 버림받은 여아들을 데려다가 계도의 명목으로 그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이 그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은 미혼모와 고아들이 마을에 섞여 살면 자신들의 ‘정상적인’ 삶을 방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수녀원과 척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거기(수녀원)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거 알지? 적을 가까이 두라고들 하지. 사나운 개를 옆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고.”

jayeon-sog-ui-yasaeng-dae.jpg 사나운 개를 옆에 두면 순한 개가 물지 않는다?

하루 세 번 종이 칠 때마다 기도하는 전통을 가졌으면서도 마을 사람들은 소외된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아마도) 세계적인 경기침체의 여파로 추운 겨울을 이겨낼 땔감 살 돈이 없는 사람도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내 코가 석 자일 때 남의 코를 닦아줄 수 있겠는가!

크리스마스가 임박한 일요일 미사에 참석했을 때 펄롱은 스테인드글라스에 묘사된 <십자가의 길>을 훑어보면서 영성체 받기를 거부한다. 그의 양심이 ‘너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할 자격이 없어’라고 말했기 때문이리라. 펄롱은 적극적인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소극적인 죄를 짓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한 사람을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는 성경구절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으로 가던 길에 수녀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내가 좋아할 것을 상상하며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들고 가다가 석탄광에서 추위에 떨던 세라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라는 예상대로 석탄광에 갇혀 있었고, 결국 펄롱은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맨발의 검댕 투성이 소녀의 손을 잡고 가는 그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최악의 일은 이웃의 몰이해나 아내의 거부가 아니라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반하는 행동을 계속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선한사마리아인.jpg 하지만 최악의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은 지나갔다.

펄롱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옛날이었다면 자신이 구하고 있는 아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산타에게 아빠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달라고 기도했으나 받지 못했던 실망감을 떠올리며 세라에게는 가족을 선물로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큰 행복감을 느꼈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부를 수 있는-이 빛을 내며 밖으로 마구 나오려 할 때 그는 그 천사가 나오도록 허락했다.

물론 천사와 그 가족의 앞길에 고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아서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을 마침내 해냈기 때문에 그에게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았던 평범한 일상이 천국의 삶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우화처럼 읽힌다. 시대 배경이 1980년대임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 이야기 같다. 우리는 80년대에 그런 야만적인 행위가 자행된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하만 지금의 세상은 얼마나 다를까? 단지 우리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불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닐까? 우리는. 2025년 현재에도 얼어붙은 석탄광에 갇힌 아이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 아이를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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