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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할까

김애란의 소설 『이 중 하나는 거짓말』 독후감

by 이소라

요즘은 쌍방 구원의 서사가 대세다. 어린 시절 내가 듣고 자랐던 이야기는 거의가 일방 구원의 서사였다. 자신을 박해받는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와 동일시하고 있던 우리 세대 여성들은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해줄 왕자님이 나타나리라는 환상을 품고 살았다. 어느 날 자신의 환상에 얼추 들어맞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지만, 화려한 결혼식과 신혼여행이라는 몽롱한 안개가 걷히고 현실로 돌아오면 문 앞에 ‘생활’이라는 초라한 택배 박스가 놓여 있다. 그 박스는 겹겹이 포장되어 있어서 무언가 좋은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일으키지만, 포장지를 다 뜯어내고 속을 들여다보면 그 남자 역시 자신에게 맹목적 모성을 베풀어줄 여자를 찾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베이비부머들의 대표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는 이런 결혼 이야기도 남녀가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고 상대방을 구원하기로 작정한다면 쌍방 구원의 서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당초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던 결혼에서 남녀는 상대방의 욕구와 결핍을 배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옛날이야기와 달리 쌍방 구원의 이야기는 한쪽이 영웅일 필요도 없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 속에 내재한 공정함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kids-spending-time-together-outdoors-blanket-enjoying-childhood_23-2149614764.jpg 소년, 소녀, 동물이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이야기

김애란의 소설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은 소년과 소녀, 그리고 동물들이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그중에 어른도 끼어있기는 하지만 거기엔 신데렐라도 백설공주도 왕자님도 없다. 등장인물들은 다른 인물들에게 어떠한 환상도 품고 있지 않다.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가 사고로 죽은 아이, 가정은 온전하나 엄마가 병으로 죽은 아이, 가정폭력이 원인이 되어 엄마가 감옥에 들어간 아이가 주인공인데 놀랍게도 이들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기대려 하는 대신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간다.

세 아이는 모두 같은 반 급우이지만 SNS를 통해서만 서로를 알고 있었고 현실 세계에서는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엉뚱한 자기소개 방식 덕분에 각자의 익명성이 벗겨지고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존재로서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의도치 않게 세 사람의 연결고리가 된 지우는 가끔 블로그에 소설과 웹툰을 포스팅하는 소년인데, 최근에는 자기가 키우는 도마뱀 용식이의 그림을 꾸준히 올린 덕분에 많은 구독자를 얻고 있었다. 소리와 채운은 지우의 글과 그림을 보면서 지우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소리는 모종의 초능력을 가진 소녀이고 채운은 무서운 비밀을 간직한 소년이다.

엄마가 죽은 후 엄마의 남자친구인 선호 아저씨와의 관계가 어정쩡해져서 독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지우는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반 친구 소리에게 도마뱀을 맡기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다. 지우가 소리에게 자식처럼 소중히 여기는 도마뱀을 맡긴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모친 상실이라는 공통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우는 채운과 같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던 이유로 살인미수 사건이 일어난 날 우연히 채운의 어머니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자기가 본 것과 느낀 것을 글로 써서 블로그에 올렸다. 하지만 지우는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채운은 지우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줄 알고 두려워했지만, 정작 지우가 글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지우도 채운처럼 아버지 살해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임을 알게 된다. 지우는 채운을 위해 그 글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채운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소리는 곧 죽을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덕분에 채운의 부탁을 받고 식물인간 상태인 그의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채운의 소망을 거꾸로 이해한 소리는 채운 아버지의 죽음을 감지하고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때로 진실은 사랑 때문에 거짓으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것이다.

부모의 이혼이나 엄마의 부재, 아버지의 폭력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로 인한 오해와 결핍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며 심지어 수치심까지 느껴야 한다. 그래서 가정의 결핍은 비밀이 되고, 그 비밀은 아무에게나 발설할 수 없는 위험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레드아이아머드스킨크.jpg 세 아이의 연결고리가 되어준 레드아이 아머드 스킨크

아이들의 학급 교사가 제안한 ‘이 중 하나는 거짓말’이라는 게임은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기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하는 청소년들의 섬세한 감성을 배려한 소통 방식이다. 그 게임의 규칙을 알고 있었던 선호 아저씨는 지우에게 자신을 그 방식에 맞추어 소개하지만, 그가 말한 다섯 가지는 모두 진실이었다. 선호 아저씨의 태도는 어른이라면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거짓을 방패로 삼을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아이들이나 선호 아저씨와 달리, 지우의 아버지와 채운의 아버지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장의 책임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기 감정을 핑계로 타인을 괴롭힌다. 지우의 아버지는 별다른 이유 없이 아내와 아들을 버렸고, 채운의 아버지는 자기가 실패한 데 대한 화풀이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아이들은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데 왜 어른들은 타인에게 해를 입힐까? 아이들은 타인의 결핍을 보면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도우려 하는데 어른들은 왜 그러지 못할까? 그들도 한때 아이였는데 왜 순수함을 잃어버린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 소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질문들에 맞닥뜨린다.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려면 그 전제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말해도 되는 공동체 안에 있는가?’라는. 우리는 불편한 진실보다는 적당히 얼버무린 거짓을 원하는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서로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인데, 진실을 환영하지 않는 공동체에서 쌍방 구원의 서사가 실현될 수 있을까? 쌍방 구원의 서사라는 것도 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회의적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라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우리 삶도 그렇게 바뀔까?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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