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1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독특한 소재와 서사 전략을 사용하여, ‘폭력의 생태계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방식, 또는 망가져 가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영혜는 가정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식물처럼 존재감 없이 살아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육식을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생태계에서 탈출하려 한다. 반면 언니인 인혜는 이 생태계를 떠나지 못한다. 그녀는 폭력으로 허물어져 가는 이 사회를 유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하면서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버텨온 그녀가 버티다 버티다 이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이 왔지만, 자식과 동생을 돌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녀의 발을 묶는다. 한편 영혜의 형부는 예술을 빙자하여 사회의 폭력성을 고발하지만, 사회를 바꾸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바꾸지 못한다.
다시 말해 폭력의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혜는 온몸으로 살육을 거부하고, 인혜는 허물어지려는 세계를 껴안고 안간힘을 쓰며, 영혜의 형부는 예술로 도피하려 한다. 한편 영혜의 아버지와 남편은 폭력의 일부가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 세상이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정신병자, 소시민, 예술가, 권력자이다. 슬픈 것은 이들 중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2
이 소설의 독특성은 우선 소재에 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채식주의자」는 ‘육식 거부’라는 소재를, 두 번째 이야기인 「몽고 반점」은 ‘인간에게 내재된 식물성’이라는 소재를 다룬다. 마지막 이야기인 「나무 불꽃」의 소재는 ‘정신병동’이다.
어느 날 새벽부터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를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은 장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장인은 폭력을 행사하는 가부장 사회의 대표자 격인 인물이다. 그는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딸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 하고, 급기야 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한다. 정신병원에 있다가 퇴원한 영혜는 이혼당했고, 비디오 예술가인 형부는 영혜에게 몽고반점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기괴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남녀의 나신에 꽃을 그려 넣고 두 사람이 교합하는 장면을 촬영한다는 프로젝트였다. 동물성을 폭력성과 동일시하여 혐오하던 영혜는 꽃의 이미지에 매력을 느껴 모델 역할을 수락한다. 이 기획은 결국 영혜와 형부 자신의 교합으로 실현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형부는 가정과 사회에서 추방되고 영혜는 영원히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언니인 인혜는 남편과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영혜를 저버릴 수 없어 영혜의 보호자 노릇을 자처하지만 인혜 자신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여 자살 충동을 느낀다. 마지막 장면에서 인혜는 음식을 완전히 거부하고 나무가 되겠다고 하는 영혜의 소망을 받아들인다. 영혜가 미치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미쳤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를 통해 작가는 가정 내 폭력의 결과가 피해자, 방관자, 영웅을 낳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직접적인 피해자인 영혜는 드러난 환자가 되지만, 가정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는, 책임감의 화신인 인혜는 겉으로는 영웅이지만 실상은 중증의 환자다. 영혜의 남자 형제는 방관자이자 폭력을 대물림하는 자이고, 영혜의 남편은 폭력적 사회에 영합하는 자이다. 영혜의 형부는 예술을 통해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자가 될 수도 있었는데 결국은 실패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에서는 폭력의 근원으로 그려지는 아버지 자신도 사실은 군대에서 폭력을 학습한 피해자로 볼 수 있으므로 독자는 모든 등장인물을 연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질문하게 된다. “세상의 폭력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폭력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라고.
작가는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의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고 다만 암시한다. 세상을 어린아이 돌보듯 돌보자고. 인혜의 발광 충동과 자살 충동을 막은 것은 어린 아들의 존재였다. 그녀는 생각한다. “지우가 아니라면―그 애가 지워준 책임이 아니라면―자신 역시 그 끈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고. ‘아이의 단내 나는 작은 몸뚱이’와 ‘아직 죄지어보지 않은 어린 얼굴이 곤한 잠에’ 든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강퍅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음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몸에 솜털이 돋고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지며 한없이 가벼워져서 아기처럼 되는 장면에서도 우리도 모두 어린아이였음을 기억하자는 작가의 암시가 느껴진다.
다음으로 작품에서 사용된 서사 전략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이 연작소설은 주인공이 같은 한 사람임에도 세 개의 다른 이야기로 읽히는데, 그 이유는 시점의 차이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몽고 반점」에서는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나무 불꽃」에서는 삼인칭 관찰자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혼용함으로써 작가는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러한 서사 전략은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한강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이다. 독자는 퍼즐을 풀듯 스토리를 재구성하며 읽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이야기를 영혜 남편의 일인칭 시점으로 시작한 것은 주인공을 객체로 설정함으로써 그녀 행동의 불가해함을 드러내는 영리한 전략이었다. 꿈 이야기까지 더해져서 독자는 이 이야기가 판타지인지 현실을 다루는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되고, 그 결과 호기심이 발동하여 계속 읽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는 영혜 형부에게 초점을 맞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였는데, 형부는 남편과는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영혜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하지 않은 영혜의 행동을 바라보는 남편의 감정이 불편함과 공포, 짜증과 혐오라면, 형부의 감정은 경이감과 호기심이다.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소재의 독특성과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인해 계속 읽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마지막 이야기는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했다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뀐다. “그녀는 아주 젊지 않다. 딱히 미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같은 서술로 시작했다가 “막을 수 없었을까.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처럼 인물의 내면 묘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는 영혜에 대한 인혜의 복잡한 감정을 알 수 있는데, 연민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분노, 그리고 죄책감이 그것이다.
3
세 개의 이야기에 나타난 세 개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한 사람에게 가해진 폭력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동시에 ‘사람마다 폭력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에게 던지는 작가의 두 번째 질문은, “당신은 폭력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일 것이다. 나는 폭력을 폭력이라고, 풀어야 할 문제라고 부르고 싶다. 문제는 그것을 문제라고 부를 때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