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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Feb 11. 2020

동창생의 발견

40년 만에 친구들의 진가를 발견하다

동창 1

  오스트리아에 사는 한 동기의 내한을 빌미로 79학번 독일어과 동기들이 모였다. 작년 이맘때 이 친구가 친정엄마 곁에서 명절 쇠려고 왔을 때 만났었는데 그때가 졸업 후 36년 만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녀의 오스트리아 이름이고 그녀의 남편은 순수 오스트리아인인 크리스티안이다. 그녀가 유학 장소로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를 택한 이유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종교적 이유라 하지만 교리나 신학과는 상관없이 그저 자신에게 개신교보다 가톨릭이 더 맞을 것 같아서 그 나라로 갔다고 했다.


  어렸을 때 친구에게 빵 얻어먹은 죄로 개신교 교회에 다녔던 그녀는 의리상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면서도 옆집에 사는 한 친구와 매일 새벽 미사에 함께 갔다고 한다. 장애가 있었던 그 친구가 혼자 가기 힘들었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베로니카에게는 자랑기가 전혀 없었다. 나는 이런 대목에서 격하게 감동한다. 나는 그녀가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을 영영 모르고 살 뻔했다.          


  나도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무슨 일을 했던 기억이 없다. 가끔 착한 일을 할 때도 지금 내가 선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라며. 나는 대학 때도 신앙인답게 사느라 술도 안 먹고 디스코장에도 가지 않았다. 어디에 있든 밥 먹을 때는 꼭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녀 베로니카는 기독교인 티도 안 내고 조용히 학교 다니다가, 직장생활도 하다가 돈을 모아서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갔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왠지 정신 사나운 독일보다는 조용한 오스트리아가 그녀에겐 잘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종파가 다른 만큼 사회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베로니카의 남편 크리스티안이 찍은 사진

  그녀가 오스트리아로 간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좋아하는 작가가 잉게보르크 바흐만이라는 오스트리아 여성작가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종교와 문학-만 가지고 홀로 오스트리아행 비행기를 탔던 그녀는 청소년기 우리의 우상이었던 전혜린 못지않은 걸 크러시였다. 결국 그녀는 그 작가의 작품을 가지고 학위논문을 썼다. 한국으로 돌아와 강의를 하고 있던 그녀에게 오스트리아 대학에서 만났던 푸른 눈의 남자가 찾아와 구혼을 했고 그녀는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신혼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지금 그녀는 오스트리아 젊은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 케이팝과 케이 드라마의 선전에 힘입었겠지만 학생들에게 왜 한국어를 배우냐고 물으면 한국어가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다. 매스컴에서 날마다 BTS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듣고 있던 우리지만 친구의 그 말에 하나 같이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동창 2

  마흔 넘어 결혼한 한 동기는 1년 여 친정엄마를 모시고 살다 최근에 하늘나라로 보내드렸다. 동기들이 작년에 만날 때는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다며 모임 장소를 그 친구 집 근처로 정했었다. 우리가 안 본 사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담 줄까 봐 연락도 하지 않았단다. 옛날 모습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친구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는 착한 남편 덕에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엄마가 가시고 나니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며 자기를 좀 자주 불러달라고 했다. 엄마 모시는 일에 대해 공치사도 푸념도 안 했던 그녀가 멋져 보였다.      


동창 3

  나처럼 아이가 셋에다 늦둥이까지 있는 한 동기는 불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아들인 둘째를 음악가로 키우기 위해 젖먹이 막내를 베이비 시트에 매달고 운전을 하여 유명한 선생에게 레슨 받으러 다녔다고 했다. 말이 없고 차분한 그 친구의 성격과 너무 안 어울리는 이야기에 모두들 놀랐다. 결국 Y학교와 S예고를 졸업시키고 독일로 유학을 보냈는데 지금은 쾰른 교향악단 정연주자가 되었다고 한다. 독일 교향악단의 정연주자는 정년보장 대학교수나 마찬가지라고 다른 친구가 귀띔해주었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막내인 딸도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영국에 사는 친구가 주선해주어서 음악 장학금을 받게 되어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었냐고 했더니 다른 건 못해도 기사 노릇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친구도 잘 사귀어두어서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을 받은 것도 행운이라기보다는 그 친구의 인품을 말해주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목소리도 조용조용했던 우리 동기가 이렇게 헌신적인 어머니가 되어 있다니!  


동창 4

  대학 때는 입주과외를 하느라 우리들과 거의 어울리지 않았던 한 친구는 - 사실 그 친구가 입주과외를 했다는 것도 이날 처음 알았다 - 35년 동안 KOTR*에 적을 두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았다. 외국에서 얻은 두 딸은 이중 언어를 구사하면서 머리가 더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부모의 유전자가 우월했는지 몰라도 둘 다 S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었다고 했다. 큰 딸 집 가까이에 사는 이 동기는 외손녀 바보가 되어 날마다 손녀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마지막 승진 기대가 무너진 것이 큰 실망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느라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내 부모는 용돈을 박하게 주긴 했지만 자식들에게 등록금 걱정은 시키지 않았다. 동기들은 입주과외를 하며 점심을 굶어가며 공부했다는 것을 들으니 내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알 수 있었다.        


동창 5

  이 친구는 내가 졸업한 후 편입한 친구라 학창 시절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만 않지만 동기들 대화방에서 날마다 좋은 음악을 소개해준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조예가 있는 그의 백그라운드가 무엇인지 늘 궁금하던 차였기에 물어보았더니 M 방송사 문화부 기자생활을 했다고 한다. 좀 더 일찍 알았다면 그의 보도를 시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기들과 연락을 두절하고 살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나이 육십에 글을 써보겠다고 들썩이는 나로서는 절필하고 재야에 묻혀 살며 목요일에는 인사동 화랑 골목을 거니는 은퇴한 글쟁이가 내 동기라는 사실이 왠지 씁쓸하다. 늦깎이 조연배우가 동갑내기 주연급 배우의 은퇴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그 당시에 우리가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듣고 서로의 꿈을 나누었으면 어땠을까? 내 용돈을 아껴 친구들에게 밥 한 끼라도 사 주려고 했을까? 나도 글 쓰는 직업이나 책 만드는 직업을 가져볼 생각을 했을까? 유학의 꿈도 꾸어 보았을까?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을 좀 더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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