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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Feb 11. 2020

주관을 가진 그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첫 직장인 자동차 회사에 입사한 직후였다. 나는 대학 졸업반일 때 취직을 했는데 80년대 초였던 그 당시는 모든 산업이 발전하고 있던 때라 일자리가 많았다. 독일어과 출신인 내가 자동차 회사에서 한 일은 독일어로 된 설계 도면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독일 회사의 기술제휴를 받아 국산 브랜드의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설계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해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졌다. 독일어와 영어는 어원이 같고 전문용어는 동일한 경우가 많았기에 내가 하는 번역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료 사원들은 독일어와 영어 두 외국어를 통달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우러러보았다.     


  그녀는 여상을 졸업한 후 6년째 그 회사 관리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음악과 기독교 신앙이었다. 어느 날 사내 합창단에서 피아노 반주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입사할 때 썼던 신상명세서에 나의 특기를 피아노 연주로 기입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합창단 반주를 하게 되었다.


  보통은 통근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그날은 왜 시내버스를 탔는지 모르겠다. 시내버스 맨 뒷줄에 앉았다가 나를 알아본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녀가 합창단원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피아노를 치는 독일어 번역사 원인 내게 호기심을 보였다.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내게 회사 신우회를 소개해주었다. 그날 이후 그녀와 나는 매일 같이 점심을 먹고 그녀의 작은 사무실에서 같이 커피를 마셨다.


  내가 일하는 기술표준연구소는 회사 전체로 보면 지극히 작은 구역에 있었고 대부분의 회사 부지는 거대한 조립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사원식당으로 가려면 그녀가 일하는 허름한 사무실을 지나야 했다.  그 회사에 다녔던 1년 9개월의 시간 동안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지루한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었다. 모든 땅을 아스팔트로 뒤덮어 놓아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보기 어려웠던 그 회사의 작업 환경은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번역에는 어떠한 창조성도 필요치 않았다. 지금이라면 AI가 얼마든지 해 낼 수 있는 단순 번역이었다. 우리는 짧은 점심시간을 쪼개어 성경공부를 하고 신우회 예배와 수련회에 참석했다. 합창단 활동도 계속 같이 했다. 그녀와 나의 대화는 오후 일과가 시작될 때까지 끝날 줄 몰랐다.


  내가 먼저 결혼을 하고 두 달 후에 그녀가 결혼했다. 노동법상 여사원이 결혼을 한다고 해서 퇴사를 해야 하는 규정은 없었지만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한 여비서에 대해 다른 여직원들이 수군대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라 나는 임신을 하자마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도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나왔다.


  큰 딸을 낳고 연락을 해보니 그녀도 같은 날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참 신기한 우연이었고 그래서인지 우리의 우정은 더 깊어졌다. 그 후로도 아이를 데리고 가끔 만났지만 내가 대전으로 내려오면서부터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이 힘들 때 전화로 호소하면 그녀는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한 내가 음대에 편입했을 때 그녀는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었고 졸업 연주회 날에는 둘째를 등에 업고 나를 보러 와주었다. 그 후 그녀도 음대에 들어갔다. 수능시험부터 준비해서 들어간 대학이었으니 나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했다.     


  그녀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외동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싶어 해서 내가 조금 돕기도 했다. 그 아이는 값비싼 레슨을 받지 않고도 S여대 피아노과에 들어갔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원까지 졸업하여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큰 합창단에서 반주도 오래 하였다. 인연이 되려는지 나의 지인 아들과 그녀의 딸을 중매한 것이 잘 되어 둘은 결혼에 골인했고 최근 임신 8주 차라는 소식을 들었다.


  두 집안 어머니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내게 회갑 기념으로 책을 쓰라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회갑 기념으로 독창회를 했다는 것이다. 연주회장을 빌려 거창한 독창회를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속한 합창단 연습하는 날 단원들에게 한 시간 일찍 나와 달라고 부탁하여 그들 앞에서 당신의 독창회를 한 것이었다. 말만 들어도 멋졌다. 누군가는 축하의 의미로 간식을 준비해주었다고 했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독창회를 한 그녀가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전에도 교회 창립 기념일에 가족 음악회를 열었었다. 그녀의 남편은 목사님이다.


  그녀의 말은 내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 후 나는 글쓰기 교실을 열심히 찾아다니며 본격적인 글쓰기에 입문했고 드디어 카카오 브런치에까지 글을 싣게 되었다. 내년이 내가 육십 세 되는 해이다. 그녀의 격려는 내 영혼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내년에는 한 권의 책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기 딸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불렀다. 반주는 안사돈이 했다. 사위의 어머니는 피아노과 교수이다. 그러한 제안을 그녀가 사돈에게 했고 사돈인 나의 지인은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그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자기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딸이 가정을 이루게 된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수백 명 하객 앞에서 노래를 했다.


  지난주에는 남편인 목사님의 환갑 생일이었는데 그녀는 사돈도 초청하여 교회에서 교인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녀와 남편은 안산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고 교인의 반은 그녀의 친정식구들이다. 그녀는 남의 눈에 초라하게 보일 수 있는 그런 교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돈 부부와 사위의 할아버지, 고모와 고모부가 모두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있는데도 그녀는 사돈댁에 기죽지 않는다. 여상 출신으로 대학 출신인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그때 모습 그대로, 여전히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자기 주관을 가지고 사는 그녀를 나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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