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라 Feb 11. 2020

그 남자의 죽음이 내게 남긴 것

  그는 내가 일하는 자동차 회사 기술표준연구소의 도서관 관리자로 왔다. 말이 관리자이지 하는 일이란 비치된 설계도면이나 자동차 관련 기술문서를 대여하고 반납하는 일이 다였다. 그는 거의 하루 종일 놀다시피 하면서 번역 사원인 나와 농담 따먹기나 하려고 했다. 그와 매일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졸업을 앞두고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장애인은 가톨릭 사제가 될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자동차 대리점에 입사하여 높은 영업실적을 올렸고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던 여사원과 전화 연애를 하여 결혼까지 했다. 그렇게 행복을 찾았나 싶었는데 다시 한쪽 귀마저 멀어버렸다. 검사를 통해 그의 뇌 속에 종양이 자라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오른쪽 팔이 기능을 못하게 되어 그 팔을 절단하고 의수를 끼었다. 보청기와 의수를 낀 장애인이 자동차 영업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과거 실적을 인정한 회사는 그를 한직으로 발령 내주었다. 그렇게 그는 광주에서 부평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사진으로 본 그의 아내는 아름다웠다. 서울 본사에서 비서로 일했던 만큼 도회적 세련미가 있었다. 그는 늘 아내와 아들을 자랑했다. 어느 날 그가 집들이 겸 아들 돌잔치로 기술표준과 직원들을 초대했다. 그런데 참석자는 우리 과 소속 여덟 명 중에서 과장님과 나 둘 밖에 없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진 음식들 앞에서 그의 실망한 얼굴이 역력했다. 과장님과 나 역시 민망함을 감추며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평소에도 나와 과장님 외에는 그와 말을 섞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의 외모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의 독특한 말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답게 그는 아는 것이 많았고 굳이 아는 티를 냈다.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여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기보다 밝은 체하고 싶은 그의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는 한 턱 내는 것으로 직원들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썰렁한 집들이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비보가 들려왔다. 그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한 것이었다. 그의 집들이에 가지 않았던 직원들도 장례식에는 참석했다.   


  그 후 죽은 사람에 대해 화제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일에 열중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마쳤건만 그와 한 공간에서 일하며 매일 접촉하던 사람들은 그가 마치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인양 굴었다.    


  그 사람은 나를 따라 기독교 신우회에도 나갔었다. 그가 뇌종양 수술을 하면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자기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건지 몰라 두려움이 밀려왔다고 했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죽기 전에는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알 수가 없다. 개신교인 모임인 신우회에 나와서 그는 그 문제에 집착했다. 개신교 교리는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언제 죽어도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신우회 모임을 통해 평안을 찾는 듯했던 그가 다시 갈등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에서는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죄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딜레마를 끊임없이 내게 말했다. 죽고 싶다는 말도 하기 시작했다. 좋은 말도 한두 번 들을 때 좋은 것이다. 내가 대답해줄 수 없는 고민거리를 계속해서 말하는 그를 상대하기가 점점 싫어졌다. 그를 피하며 외면하던 나날이 계속되던 중 그가 죽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내게 엄청난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죽고 싶다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던 내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만 같았다. 20대의 어린 여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장례식에서 만난 그의 아내, 소복을 입고 머리에 흰 리본 핀을 꽂은 그녀는 슬퍼서 더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우리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이 입사했다. 독일에서 공부하다 온 목사라고 했다. 문서들이 모두 독일어와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외국어 능력이 메리트가 된 것 같았다. 도서관은 업무상 내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새 직원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죽은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새 직원은 내가 슬픔과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그를 좋아했었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아무리 아는 것이 없었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이 사람과 말도 하기 싫었다. 퇴직한 후 소식을 들으니 그는 사기꾼이었다. 독일에서 공부한 적도 없었고 목사도 아니었다. 어쩐지 내가 번역이 잘 안 되어 질문을 을 때 얼렁뚱땅 넘기더라니.        


  세월이 흘러 내 나이 60을 바라보고 있다. 30대 때 전화상담기관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것이나, 40대 때 상담학을 공부한 것은 내 무의식 속에 그 남자에게 빚진 마음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내가 그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떠올랐었다. 들어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자기 자신을 괄호로 묶어 놓아야 한다. 듣는 일은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 남자가 내 인생에 드리운 그림자는 그렇게 나를 평생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외로운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외롭고 슬픈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나의 이 증상이 병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것이 병이라 할지라도 죽음에 이르는 병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희망에 이르는 병이며 생명에 이르는 병이라고 믿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똑똑한 소비자가 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