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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Feb 11. 2020

죽을 때까지 우리를 가르친 사람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독후감)

  노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주제로 쓰인 글을 찾아 읽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죽음의 방식이 삶의 방식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배워가고 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의 결과인 것이다. 좋은 죽음의 조건은 무엇일까? 일차원적 의미에서 좋은 죽음은 두려움이 나 고통이 없는 죽음이다. 그러나 더 확장된 의미에서 좋은 죽음이란 아름다운 삶에 따라오는 죽음이다. 인생의 과업을 완수하고 만족하며 죽는 죽음이다.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경제학자이자 자연주의자로 잘 알려진 스콧 니어링의 마지막 모습은 그의 아내 헬렌 니어링이 쓴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잘 나타나 있다. 니어링 부부의 이름은 오래전 대중매체를 통해 접한 적이 있었지만 내 관심을 끌지 못했었다. 도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산속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당시 세속적 성공의 가치관에 젖어 있던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년의 아버지가 시끌벅적하게 죽음을 예고하는, 또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병원과 집을 오가는 지금의 시점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중고서점에서 헬렌 니어링의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주저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책날개에는 남편 스콧 니어링과 헬렌 본인이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의사와 약의 도움 없이 평온하게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이 죽음의 방법을 선택한 과정과 그렇게 했던 이유가 궁금하였다. 


  스콧 니어링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고통이 있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고통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줄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러한 목적에 자기의 능력을 써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말로만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고통에 기대어 살지 않기 위해 자급자족하는 삶을 선택했다. 지구와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생활방식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그는 숲 속으로 들어가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밭을 갈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같은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고 노동과 독서와 집필로 이루어진 단순한 삶을 살았다. 영혼의 동반자인 헬렌의 지지가 있었기에 그는 세상의 이목에 신경을 덜 쓰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꿋꿋이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독자적인 삶을 살았던 스콧 니어링은 죽을 때도 ‘신중하게 목적을 갖고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정연하고 의식이 있는 가운데’ 죽기를 원했다. 그는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노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자 했다.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고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었다. 남편의 죽음 방식을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헬렌은 남편에게,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가세요. 같이 흐르세요.”라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 스콧 니어링은 ‘나무의 마른 잎이 떨어지듯 숨을 멈추고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헬렌 니어링은 ‘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고 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생각하며 남편이 성공한 삶을 살았음을 확인한다. 스콧 니어링과 반세기를 함께한 아내가 그의 삶과 죽음이 모두 훌륭하고 아름다웠다고 말하는 것은 그 누구의 증언보다도 믿을 만하다. 헬렌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스콧의 삶을 칭송하였다. 스콧 니어링이 마지막을 보냈던 마을의 사람들은 추도식에서 그가 자기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증언했다. 많은 증언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콧 니어링이 백 년을 살아서 이 세상이 더 좋은 곳이 되었다.”는 말이었다.


  죽음을 일컬어 위대하고 끝이 없는 명상이라고 말하는 헬렌 니어링, 남편 못지않은 지성의 소유자인 그녀가 쓴 이 책에는 죽음에 관한 지혜로운 통찰이 차고 넘친다. “죽음은 육체를 갖고 사는 삶의 휴가이자 새로운 전환점이다. 죽음은 삶이라는 학교를 떠나 이제 그만 일하라는 통지를 건네주며 쉬라고 말한다.”라고 그녀는 쓰고 있다.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녀는 초연하게 말한다. “이제 가야 할 때, 천천히 내릴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해왔던 일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나는 걱정 없는 행복한 여행객이었으며, 이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모퉁이를 돌면 끝이다.”     


  그들 부부의 평범하지 않은 연대는 통속적인 부부관계의 정의를 넘어선다. 먼저 떠난 남편에게 보내는 글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하면서 또한 함께 해온 많은 것들을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비로운 작용으로 평등하게 되었고, 하나로 우리의 삶을 살았습니다.”라고. 두 사람의 관계는 역사상 보기 드문 것이다. 두 사람이 이렇게 뜻을 합하여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부부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들의 가치관이 일치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관의 일치뿐 아니라 그 가치관 자체가 그들의 삶이 조화롭게 살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타고난 교사이자 실천가였던 스콧 니어링은 30대에 발견한 자신의 이상을 죽을 때까지 좇아 살았다. 소외된 자들의 인권과 세계평화를 위해 목소리를 냈던 그는 세속적인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린 후에도 자신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철학은 아내에게 고스란히 공유되고 한층 더 숙성되었으며 그의 죽음 방식도 그의 철학의 표현이었다.   


  스콧 니어링은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을 가르쳤다고 헬렌은 말한다. 그가 가르친 것은 사람이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은총에 가득 찬 그의 떠남에서 한 생명체가 자기 힘을 다 쓰고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 헬렌은 “죽음이 그의 삶을 밝게 비추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누군가의 삶을 바르게 조명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연적임을 의미한다. 사람이 살아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경우가 제법 있으나 죽음으로 가르친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위대한 성인들은 그렇게 했다. 악법도 법이라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 독주를 마신 소크라테스처럼.     


  스콧과 헬렌 니어링은 가난한 자의 친구이자 힘없는 자의 대변인으로 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말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의 말이 힘을 얻는 것은 땅에 뿌리박은 50년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말의 위력을 실감하고 글쓰기에 입문한 나는 말에 힘을 싣는 것은 문장력이 아니라 나의 삶임을 깨닫고 마음이 무거워진다. 헬렌의 말대로 삶에 빛을 비추는 것이 죽음이라면, 사람의 말을 비추는 것은 그의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생각과 말을 해야 하는 동시에 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바른 행동은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사람은 신념대로 행동했을 때 감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도 그렇게 했다. 삶으로 말했고 죽음을 환영함으로써 삶을 사랑했음을 증명했던 두 사람의 현인이 이 땅에서 백 년을 살다 갔다. 스콧 니어링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이었으나 그들 부부가 백 년을 살다 갔기에 이 세상은 그나마 덜 황폐해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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