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면 서기의 일본 탈출기

김장순의 ⌜일본 탈출기⌟

by 이소라

부모의 든든한 뒷받침도, 강건한 체력도 갖지 못했던 청년 김장순은 독학으로 읍면서기 시험 준비를 하고 자랑스럽게 합격한다. 근무지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난데없이 지역유지 아들 대신 징용에 불려가게 되고, 오사카의 시바다니 조선소에서 8개월을 일하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살기 위해 조선소를 탈출한다.

「일본 탈출기」는 동네 대서장이로 생을 마감한 김장순의 강제 징용 회상기이다. 유명 작가도 아닌 평범한 노인이 쓴 글이지만 이 책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료인 동시에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에세이다. 책의 초고는 1987년에 완성되었으나 거의 30년 후에 발간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대 권력가인 인촌 김성수의 아들을 대신하여 저자가 징용에 끌려간 사연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10213_121644902.png 징용에 끌려간 청년들

저자는 글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작은 것 하나까지 기록하는 습관, 어려운 시대에 신간을 매달 두 권씩 사서 보는 독서열, 문어체와 구어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능력. 그리고 돈 없고 힘없어서 겪어야 했던 억울한 일을 한탄하며 원망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가족에 대한 의무를 묵묵히 감당했다는 점이 존경스럽다. 죽음을 무릅쓰고 조선소를 탈출한 것도 소년가장이나 마찬가지였던 자신을 기다리던 가족들 때문이었다.

김장순이 징용을 피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꿈꾸던 대로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법관이 되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생각해본다. 그랬어도 그의 문학재능이 꽃필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모름지기 글이란 모종의 절실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재능을 실현한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생각할 때, 평범한 대서장이로 살았을망정 이렇게 좋은 글을 남겼으니 김장순의 삶은 매우 생산적이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섯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길러냈다. 저자의 큰 아들이 이 책을 출간한 문학평론가 김영호 선생이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담담한 기술(記述)에 있다. 줄포에서 부산까지, 부산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시모노세키에서 오사카까지, 지나는 길목마다 마주치는 풍경에 대한 간결한 묘사와 그 자신의 소회(所懷)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바다니 조선소에서는 형편없이 부족한 음식, 조선인 동료들의 무지함과 조선인 지도원들의 잔학함에 시달렸지만, 일요일에 외출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대판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밀감 농장을 발견한 그가 뜻하지 않게 밀감장사로 돈을 벌게 된 것은 그의 깜깜한 인생에 비추어진 손바닥만 한 햇빛 같은 것이었다. 일본을 탈출할 때 통통배를 타고 가며 겪은 일들과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걸리버 여행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의 시선을 통해 읽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특성은 우리의 고정관념과 많이 달랐다. 저자에게 좋은 인상을 준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조선인 중에는 동포를 등쳐먹는 사람도 많았다. 잘못 읽으면 조선인들이 비열한 기회주의자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이들이 조선을 떠나 일본까지 흘러들어온 데는 수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사연 중에는 이들의 성격을 각박하고 야비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혐오가 연민으로 바뀐다.

한편 일본 본토의 경찰들은 인간적인 면도 많이 갖고 있었는데 조선 땅에 있던 일본 순사들은 이를 데 없이 잔인했다. 어느 쪽이 일본인의 진짜 모습인지 묻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람의 성격이란 그가 처한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작품으로서 「일본 탈출기」의 백미는 대판 공습장면과 공습 후 폐허에 대한 장면 묘사이다. 내 나랏일이 아니니 ‘황홀하고 웅장한 불구경’일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폭격의 순간은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이었을 텐데 그 순간을 어쩌면 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을 글로 쓸 수 있었는지 경탄이 절로 나왔다. 동영상을 찍어두었다가 그것을 다시 보았다 해도 이처럼 사실적, 문학적으로 묘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속담과 방언의 보고라고도 할 수 있다. 회원들과 함께 책에 소개된 속담들을 찾아보면서 그 유래와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오가리 개 패는 소리’, ‘왕솔나무 밑에서 곡식 못 자란다.’, ‘의붓집 데려온 자식처럼’, ‘잡아먹으려는 개 밥 주듯’, ‘키 큰 삼대 쓰러지듯’, ‘약질도 한창 때’, ‘장님 개울에서 허우적거리듯’, ‘얼음에 배 밀 듯’, ‘맹물 마시고 된 똥 누라고’, ‘서리 맞은 구렁이처럼’, ‘고치 먹은 여시 머리 내두르듯’, ‘같은 돈 열 냥이면 과부 집 머슴 산다.’, ‘구정물 통에 호박씨 놀 듯’, ‘혓바닥은 작아도 침은 멀리 뱉는다.’ 등 처음 듣는 속담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우리 독서 모임은 30대부터 60대까지의 회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젊은 회원들에게는 이 이야기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회원 중 한 명은 처참한 징용살이와 극적인 탈출 장면을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아 실망했다고 했다. 더 많은 고생을 한 사람들도 많은데 이 정도의 이야기가 책을 낼 소재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랬던 그가 다른 회원들의 독후감을 듣고 나서는 책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게다가 독서 모임을 왜 하는지 그 이유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운영자로서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직전 모임에서는 어려운 책(에릭 프롬의「자유로부터의 도피」)을 읽느라 모두가 피곤해했는데 이번 책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회원들과 대화하며 인촌 김성수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친일인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자기들 땅에서는 교양 있고 인간적인 일본인들이 조선 땅에 와서는 그토록 잔인하게 굴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조선보다 정신적으로 일찍 깨어난 일본국민이 어떻게 군국주의 체제에 항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도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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