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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Dec 06. 2020

글쓰기, 이순신과 김종대와 내가 만나는 지점

김종대의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습니다⌟를 읽고

  이순신은 22세에 무인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 후 무예 수련을 거쳐 32세에 무과에 급제했고, 15년의 군 생활을 거쳐 47세에 전라 좌수사가 된다. 지금으로 보면 함대사령관 정도의 지위였으니 승진이 이른 편은 아니었다. 무과에도 먼저 합격하고 경상 우수사직도 먼저 얻었던 원균이 이순신을 처음부터 무시한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그해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이었다. 이미 전운을 감지하고 있었던 이순신은 좌수사로 부임한 직후,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전라좌수영의 체제와 내용을 충실히 하기 시작한다. 그는 180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거북선의 아이디어에 새로운 구상을 덧붙여 막강한 철갑전함을 완성한다. 거북선의 완공일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날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막강한 철갑전함, 이순신의 거북선

  젊은 공군 법무관 김종대는 이은상이 쓴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접하면서부터 이순신에게 깊이 빠졌다. 이순신 장군은 군인과 공직자의 표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이순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이순신 알기와 이순신 알리기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는다. 김종대는 절개와 충의의 대명사인 이순신이 어떠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학문은 어느 정도였는지, 군 생활을 시작한 후 지휘관이 될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할 때만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진정한 사표로 삼을 수 있고, 나아가 장군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습니다⌟는 김종대가 40년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이순신을 공부하며 느꼈던 설렘과 전율을 함께 느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마음을 독자가 함께 느끼도록 해야 한다. 탁월한 문장력으로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작가도 있지만, 김종대는 자신이 관심을 가진 대상을 집요하게 천착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을 통해 그러한 목적을 달성했다.  

        

  이순신이 무인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김종대의 연구를 통해 이순신이 무인의 길을 가기로 한 과정을 탐색해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문신들이 대접받던 시절에 순신이 무인의 길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덕수 이씨 집안의 선조들은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권력자를 무서워하지 않고 직언을 했다. 이러한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은 순신이 어릴 때 군사훈련소의 함성소리를 듣고 자란 것과, 무인 출신인 방진의 딸과 혼인한 것이 무인의 길을 가도록 영향을 미친 환경적 요소임이 틀림없다. 

김종대는 관심의 대상에게 평생 집요하게 천착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무인의 길을 가도록 한 더 중요한 요인은 순신 자신의 수양과 학문의 결과였다고 본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신수양을 시작하여, 말을 적게 하고 가벼운 감정 표현을 삼갔다. 이러한 내적 수양은 외적 무예 수련과 더불어 주변 사람들이 이순신을 높은 기상과 단아한 선비의 면모를 겸비한 장수로 기억하게 했다. 또 그의 학문은 실천, 성실, 신의를 중시했던 공자의 가르침(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말)을 내면화할 정도로 성숙한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말로만 애국충정을 내세우면서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어있던 당대 지식인들의 모습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무인의 길을 택한 것은 이처럼 그의 내면과 환경이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그를 가까이서 본 사람들에게 이순신은 이렇듯 수양을 쌓은 선비였다. 저자는 이순신이 자기 수양을 위해 틈만 나면 글쓰기와 활쏘기를 했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는 조용한 성격의 이순신에게 잘 어울리는 활동이었다. 작가 지망생인 나는 그의 글쓰기에 마음이 끌린다. 순신이 쓴 글 중에 일기, 시,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 등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의 일기는 장계의 기초자료로 쓰기 위해 기록한 목적도 있었을 테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뿐 아니라 부모와 처차식을 사랑하는 마음, 오랜 시간 진을 지키며 곱씹어야 했던 외로움이 여과 없이 나타나 있다. 

  또 그는 감정이 격해질 때는 종종 시를 썼다. 사랑하는 신하를 잃었을 때나 노모와 막내아들을 잃었을 때 애끊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산문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던가 보다. 이순신은 이렇게 자기의 내면의 아픔을 글로 승화시켰다. 장계를 올릴 때는 한 점 거짓 없이 쓰고 자신의 공은 감추되 신하들의 공을 높여주었다. 이렇듯 이순신의 글은 그의 공정하고 겸손하며 진실한 인격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다.      

감정이 격해질 때 순신은 종종 시를 썼다.

  김종대 판사와 이순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아있다. 이 두 사람에게는 공부와 삶이 별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사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글쓰기를 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종대는 실증적인 역사연구가의 눈으로 이순신을 탐구했고, 그에 대해 엄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격전지에서 유언처럼 써 내려간 이순신의 글들이 없었다면 김종대의 연구가 지금처럼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순신의 글 역시 그 누구의 글보다 사실적이고 진실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나도 이분들과 만났다고 생각한다.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이순신과 40년간 바르고 곧은 길을 걸어온 김종대에게 나를 빗댄다는 것이 가당치 않은 일이지만 나 같은 사람이라도 위인들의 발자취를 조금은 따를 수 있지 않겠는가? 

  작가 지망생으로서 나는 이순신과 김종대의 글쓰기에 빚지고 있다. 편의상 이순신의 글쓰기를 정신수양으로서의 글쓰기, 김종대의 글쓰기를 사실 기록으로서의 글쓰기라고 불러보겠다. 이 두 사람의 글쓰기는 나의 글쓰기 방향과 일치한다. 


  나는 자전적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다. 자전적 이야기 쓰기도 역사기술과 비슷한 면이 있다. 먼저 사실에 기초한 기본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정보는 기억과 기록에 의지해서 찾는다. 인간의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기록 또한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정확한 사실을 수집했다 해도 그것을 서술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나의 고정관념과 선입견에 의해 오염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기억이 정확한지, 사실에 대한 나의 해석이 타당한지를 늘 검토해야 한다. 나는 내 글의 객관성과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사실 확인을 하기도 하지만 ‘일단 쓰고 보는’ 편이다. 지인들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며 지식의 오류를 지적받기도 하고 같은 사건을 나와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들을 수집하기도 한다….


  이순신은 나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다가와 학문과 삶의 일치를 보여준 군자가 되었다가, 자기 임무에 최선을 다한 공직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나의 글쓰기 스승이 되었다. 이 책을 읽는 도중, 이순신의 발자취를 좇아 거제도와 한산도, 울돌목과 노량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거기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묵직하고, 침착하라.” 하신 전령 제1성을 듣고 싶었다. “이 지방에 사는 창생들로 고아가 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지나는 산마다 피난민이 없는 데가 없습니다.”라고 쓰신 장계를 기억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부하를 잃고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쓴 “둔한 재주 적을 칠 길 없을 적에 그대 함께 의논하자 해를 보듯 밝았도다.”라는 시구도 읊어보고 싶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산처럼 묵직하고, 침착하라.

  쓸데없는 모임이 확 줄어든 요즈음은 독서와 글쓰기를 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내가 김종대의 글쓰기를 통해 이순신을 만난 것처럼 나의 글쓰기를 통해 누군가가 이순신과 김종대를 만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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