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제발 우릴 돕지 말아주세요
아빠가 유언을 해야겠다며 나와 남편을 찾는다고 했다. 1월 1일에 인사 다녀오고 그 후엔 잠깐씩만 들렀으니 아빠가 외로움을 느끼시는 것이다. 엄마는 아침마다 밥 안 먹겠다고 버티는 아빠와 씨름을 한다고 했다. 엄마가 부엌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으면 “못 먹는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소라 불러라.” 하는 말을 하시는 것이 이틀에 한 번 꼴이란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달래고 달래서 음식을 먹이고, 아빠는 못 먹는다던 음식을 한 그릇 다 비우신다. 아빠가 요즘 아침식사로 드시는 것은 토마토와 고구마, 삶은 달걀을 섞은 것이다.
남편이 출근하고 없었기에 나 혼자 친정에 갔다. 아빠는 내 손을 잡고 연극배우처럼 말씀하셨다. “너 때문에 내가 행복했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연습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나도 연기력을 발휘하여 응답했다. “나도 아빠의 딸로 살아서 행복했어요.” 아빠가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해주신 것, 대학교육을 시켜주신 것, 좋은 배우자를 짝지어 주신 것이 감사하다고 나는 말했다. 무엇보다도 10년 전 내가 혈액암 투병할 때 늘 병원에 같이 가셔서 항암주사 맞는 동안 기다려주시고 기도해주신 것 감사하다고, 아빠 덕분에 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다음에 아빠는 “내가 너희를 더 도와주지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 하셨다. “아빠는 다른 부모보다 두 곱절 세 곱절로 도와주셨어요. 더 이상 도와주실 것이 없어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아빠의 속마음은 남동생을 더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것임을 나는 안다.
역시나 “철수(가명)가 불쌍하다.” 하시더니, “지금 돈도 못 벌고 있는데 우리 집에 와서 살게 하고 싶다. 여기서 월급 의사노릇이라도 해서 영수(가명) 등록금을 벌면 좋지 않겠느냐?” 하셔서 “철수는 한국에서 못 살아요. 한국에서 살면 쫓기는 것 같아서 살 수가 없대요. 가난해도 미국에서 사는 게 좋대요.” 그리고 “철수는 이제 돈 못 벌어요. 지난번에 보셨잖아요. 하루도 일 못하는 거.”
동생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나 돈 버는 것은 포기하라고 말씀드렸다. 영주권이 있으니 미국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 밥은 먹고 살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끝없이 반복되는 아빠의 걱정과 그 해결책에 대한 나의 입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이런 말까지 하진 못했다. 이번에 동생이 왔을 때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에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 자신이 동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니 아빠에게 그렇게 말하기도 더 쉬웠다.
그리고 당신이 운명하면 시니어스 요양병원 의사를 불러서 사망진단서를 받으라고 하셨다. 시신은 집에 오래 두지 말고 병원으로 옮겨 사흘장을 치르라고 하셨다.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실 때 나는 걱정 마시라,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며 아빠 말을 막았었다. 오늘은 아빠의 걱정을 인정해드리고 사후의 절차도 아빠가 원하는 대로 다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밖에 엄마에게 상처주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나는 못들은 체했다. 엄마가 내게 상처준 것은 어쩌고 내가 준 상처만 계산하는가? 엄마의 상처는 엄마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만사를 자기가 아니면 해결할 사람이 없다고 믿는 아빠와 나에게 상처받았다고 아빠에게 하소연하는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짜증이 확 밀려왔다.
한참을 말씀하신 아빠는 엄마를 보고 밥 먹으라고 하셨는데, 그건 당신이 시장하다는 뜻이었다. 아빠를 일으켜 식탁에 앉혀드렸더니 토마토고구마범벅을 한 주발 다 드셨다.
그 다음은 엄마의 신세한탄이 시작되었다. 아빠가 일어나자마자 “소라 불러라, 문서방 불러라, 철수 불러라, 은주(가명) 불러라.” 하시면 그걸 달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하였다.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밥을 먹이기 위해 일으켜 앉히는 것이 힘에 부치는데도 그 말을 내게 하면 왜 아빠를 퇴원시켰냐고 할까봐 힘들다는 말도 못한다고 울먹였다.
그렇다. 지금도 내가 할 말은 그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왜 퇴원시켜놓고 또 하소연하시는가 말이다. “마음이 힘든 것보다 몸이 힘든 것이 더 나아!”라고 했던 사람은 엄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는가? 힘이 들면 사람을 써서 힘든 것을 줄일 생각을 하시면 좋을 텐데 힘들다, 힘들다고만 하면 자식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연금은 이럴 때 쓰라고 주는 것인데 그 돈은 아무 도움도 안 주는 아들에게 다 보내면서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가?
아빠가 서울에서 어금니 임플란트 치료를 시작했다가 중도에 대전으로 이사 오시는 바람에 끝내지 못했던 치료를 연초부터 동네병원에서 받고 있었다. 동생이 한국에 두 달 와 있을 때 보훈병원 치과의사가 자기 아는 사람이라며 그 의사한테 가면 두 번 만에 치료를 끝내준다고 했다. 엄마는 희망에 차서 아빠를 보훈병원 치과로 모시고 갔다. 다니던 의사와 상의도 하지 않고 병원을 바꿔버리는 엄마 아빠에게 화가 났지만 명색이 치과의사인 아들이 하는 말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아빠의 치아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고 동생은 돌아갔다.
치료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어금니가 다시 아파져서 앞니 밖에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때 엄마는 다시 보훈병원 치과에 모시고 가야겠는데 코로나도 겁나고 날도 추워서 못 간다고 말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이제 더이상 보훈병원까지 모시고 다니지 못하겠으니 치과 뿐 아니라 모든 과를 동네병원으로 옮기자고 했었다. 그때는 내 말을 수긍하시는가 싶더니 오늘은 보훈병원에 가야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해결한다며 병원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의 장단에 맞춰 춤추다보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모습은 엄마와 동생이 똑같이 닮았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나의 태도는 냉소적이다 못해 비아냥거리는 정도가 되었다. 엄마는 이런 나의 태도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아빠는 스스로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엄마는 스스로가 천사라고 믿는다. 우리 집에서 평범한 인간은 나밖에 없다. 자식을 돕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것임을 배우기에는 너무 늙었을까, 내 부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