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수북수북'에서 두 번째 읽은 책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페스트」였다. 이 소설은 19세기 초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을 모티브로 하여 가상의 시기에 가상의 도시 오랑에서 일어난 참혹한 재앙을 그렸다.
회원들과 함께 이 소설을 읽을 당시만 해도 전 세계의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20여만 명, 우리나라는 만 명 정도였다.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코로나가 전국, 전 세계로 퍼지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때였다. 따라서 페스트 환자들을 수용할 곳이 없어 시립경기장에 임시 진료소를 설치했다는 등의 소설 속 이야기가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었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느껴보려고 애썼을 뿐, 이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전염병 자체의 심각성이나 병의 치료법이라는 주제 대신, 불가항력적인 재앙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절망감과 연대감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1년이 지나고 전 세계 확진자 수가 1억 명을 넘은 지금 이 책을 읽었다면 질병의 증상이나 치료법, 정부의 대처 방법에도 관심을 기울였을지 모르겠다.
나는 회원들이 다소 난해한 이 이야기에 몰두하게 할 방법을 찾던 중 ‘훌륭한 소설가는 인물이 살아 움직이게 한다.’라고 한 모티머 J. 애들러(「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의 저자)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회원들에게 주요 등장인물 한 사람씩을 매칭해 주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독서하면서 해당 인물이 되어 일인칭 글쓰기를 해보도록 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인물 소개부터 시작했다. 코타르는 페스트로 인해 봉쇄된 도시 안에서 밀매업으로 돈을 버는 기회주의자 캐릭터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마스크를 사재기한 파렴치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코타르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국가적, 세계적인 재앙의 때에도 그것을 기회로 삼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다. 코타르를 맡은 회원은 “페스트는 날 살게 해줬다.”라는 말로 소개를 시작하며 청중을 몰입시켰다.
기자 랑베르도 어디나 있을 법한 캐릭터다. 취재차 방문했던 오랑에서 페스트로 발이 묶였을 때 그 누구인들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겠는가? 여러 차례의 탈출 시도에 실패한 후 드디어 마지막 기회가 왔지만, 그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기로 한다. 그동안 의사 리외, 시민 보건대 대장인 타루 등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행동을 성찰한 결과였다.
타루는 같은 인간에게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인 아버지에게 실망과 염증을 느껴 집을 떠난 사람이다. 그의 핵심 가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다. 개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라고 믿는 그는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정치적 동지들과도 결별을 선언하고 오랑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페스트를 만난다. 이유를 불문하고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모두 페스트라고 정의하는 그는 페스트에 맞서 싸우기 위해 시민 보건대를 조직한다. '페스트 편에 서기보다는 피해자 편에 서기 위해서'였다.
그런 이유로 타루를 맡은 회원은 그를 계몽주의자라고 불렀다. 화자가 타루인지 이 회원인지 혼동될 정도였다. 그녀는 타루로 빙의하여 전시를 방불케 하는 이 상황에서도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역설했다. 시민은 개인 위생과 방역, 환자 돌보기 외에도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대의를 위해 희생하기, 자원봉사 활동하기, 무리한 탈출을 시도하지 않기, 상점 부수지 않기, 허술한 법망을 피해 범죄 저지르지 않기 등의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으로 보건대를 조직했으니 결국 타루는 행동하는 계몽주의자였던 셈이다. 사람들에게 페스트와의 싸움에서 인간의 생명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자고 권했던 타루는 페스트가 만연한 그 도시의 정신적 지주였다. 의사도, 사제도, 심지어 밀매업자도 그가 만든 공동체에 합류했다. 지금과 같은 공포와 혼란의 시대에 타루와 같은 역할을 할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랑은 다소 불가사의한 면을 지닌 공무원이다. 그는 낮에는 충실히 공무를 수행하지만 저녁 시간에는 완벽한 글을 완성하기 위해 단어 하나를 가지고 씨름을 하는 사람이다. 그의 비밀은 페스트에 감염된 후 밝혀지는데, 결국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자기를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무표정하게 반복되는 업무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에는 가버린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랑은 감수성이 부족하여 아내의 외로움을 감지하지 못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에야 그녀의 소중함을 알고 한없이 그리워하는 그랑에게 연민이 생겼다. 그랑도 시민 보건대에 합류하여 공동체가 주는 연대감 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파늘루 신부에 관한 토론이 가장 뜨거웠다. 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할 무렵 행해졌던 첫 번째 강론에서 그는 페스트를 인간의 죄악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보고 신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죄 없는 어린아이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후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두 번째 설교에서 파늘루가 한 말과 그 이후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우리는 각자가 이해한 대로 파늘루의 설교와 그의 행동을 해석했다. 내가 파악한 파늘루 강론의 변화는 '신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고백한 데 있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높은 강단에서 신의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를 포기하고 자기 인격을 멸시하는 것이다, 즉 죄인들과 고통받는 자들 옆에서 함께 고통받는 것'이라고 그는 두 번째 강론에서 말한다.
변화된 파늘루의 생각은 타루의 생각과 닮은 듯 달랐다. 타루가 페스트의 편이 아닌 '피해자의 편에 서겠다'고 한 말이나 파늘루가 '자아를 포기하겠다'고 한 말은 일맥상통한다. 타루에게는 페스트가 인간을 죽이는 살해자이듯 파늘루에게는 신이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타루가 페스트에 맞서 싸우기로 한 반면, 파늘루는 신과 싸우지 않고 복종하겠다고 선언한다. 신의 대리자로 살아온 그가 신에게 대항하는 것은 지각을 흔드는 반역행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인간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역할을 보다 능동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첫 번째 설교에서는 전적으로 신의 편에 서 있던 파늘루가 두 번째 설교에서는 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인간 옆에 서서, 신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파늘루가 신에서 인간이 된 것처럼 오통 판사도 신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다. 그는 아들의 고통을 목격한 후 타인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되고 엄하게만 대했던 죽은 아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을 품게 된다. 이런 일들이 바로 파늘루가 말한, 시련 속에서 얻는 이득일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며 나는 작가가 70년 후의 코로나 사태를 예견했는지 의심될 정도로 전염병과 그것이 인간세계에 미친 영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에 놀란다.'역병에 대해서는 완벽한 방벽을 구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한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의 죽음이란 것은 죽는 장면을 누군가가 지켜봤을 때만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역사를 통해 널리 뿌려진 1억의 시체 따위는 한 가닥 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국내 코로나 사태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일부 종교인들이 일으키는 행태를 지적하는 것처럼 들리는 작가의 다음 말들을 지지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대부분 무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선한 의지도 풍부한 지식이 없이는 악의와 거의 같은 정도로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 '가장 구제받을 수 없는 악덕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이런 생각에 근거하여 사람을 죽이는 권리를 스스로 인정하는 행위다.', '누구나 자기 안에 페스트를 갖고 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경계하고 있지 않으면, 잠시 방심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얼굴에다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