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스무 살. 남자는 스물 세 살. 둘은 너무도 사랑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같이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랑밖에 가진 게 없으니, 함께 사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여겼다. 둘은 서울 옥수동의 산동네 단칸방을 얻었다. 을지로에 있는 을지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 때, 뱃 속에 이미 아이가 생겼고... 여자의 웨딩드레스는 이미 부풀어 오른 배를 감출 수 없었다. 단단하고도 결의에 찬 표정으로 겨우 스물 넘은 그네들은 결혼식을 올렸다. 팔짱을 낀 손을 놓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험난한 세상, 둘만 있으면 못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는 공장 노동자였다. 그리고 여자도 공장 노동자였다. 남자는 경기도화성에서, 여자는 경남 통영의 섬 욕지도에서 중학교만 겨우 다녔다. 그리고 열일곱살 서울에 상경해서 돈을 벌었다. 그리고 구로공단에 있는 제화 공장에서 둘이 만나 연애를 했다.
둘이 얼마나 사랑을 한 걸까. 뱃 속의 아이가 그 증표이기라도 한 걸까.
아직 아이같기만 한 20대 초반의 남자와 여자는 부엌도 시원찮은 셋방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여자는 '임신' 이 그 때 두렵지 않았을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막함과 초조함이 있진 않았을까. 무모하고 모험심이 강했던 스물의 열기와 무모함과 낭만. 그것이 뒤섞인 어느 날 밤. 아기는 만들어졌을 테다.
점점 배가 불러왔고, 둘은 결혼식을 서둘러 하기로 했겠지.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버겁고, 무거운 일인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았을지 모른다. 앞으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 같은 것들도 느껴졌을 것이다.
봄이었을 것 같다. 둘은 벚꽃이 가득 핀 고궁을 걸었을까. 같이 손을 잡고 종로2가에서 영화를 보았을까. 자연스레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사랑의 행위를 나눴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좋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했을지도 모른다. 뱃속에 아이가 그렇게 금방 생길지도 몰랐을 거다. 앞으로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심지어 뱃속 아이의 운명, 또 줄줄이 생겨난 아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랐을 거다.
결혼식 날은 1977년 9월 18일. 아이가 태어난 날은 1977년 12월 28일이다.
과연 여자는 출산에 대한 정보를 알았을까. 인터넷도 없고, 제대로 된 책도 없었을텐데 자신의 몸의 변화와 출산이 임박했을 때의 위기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가득 부풀어 오르는 배를 안고, 불룩거리고 꿀룩거리는 태아의 움직임을 신기하게 여기면서 마냥 좋았을까. 아니면 어쩔 줄 모르는 불안함과 무지함으로 진통이 올 때까지 기다린 걸까.
꼬박 만 하루가 넘도록 진통을 하면서 온 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어 죽을 만큼 힘을 다해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아마 여자는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숨이 끊어질 정도의 고통을 참어내었던 시간. 과연 '내가 무얼 한 걸까...' 하고 후회했을지도 모르는 시간이 흘러갔을 게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걸까. 아니면 여자의 뱃속에서 뜨겁고 힘겹게 쏟아져나오는 걸까.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면서 여자의 질을 뚫고 나온 생명. 탯줄로 숨을 쉬다, 공기를 마시면서 울음을 터뜨린 아기. 남자와 여자는 부둥켜 안고 울었으리라. 둘이 이루어낸 일에 대해 감격을 했으리라. 아니면, 두려워서 아무 말 하지 못했을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태어난 아이는 바로 '나' 이고, 남자와 여자는 아빠와 엄마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한 근원인 존재들이다.
1977년 9월 18일 을지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첫 아이를 1977년 12월 28일에 낳았던 여자는 과연 자신이 서른 살에 죽을 거라는 걸 예감이라도 했을까.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놀랍고도 무서운 사실이었겠지. 바로 9년 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전혀 몰랐으니...
친엄마는 내가 아홉 살 생을 마감했다. 엄마 나이 서른 살이었다.
나는 이 사진을 처음 본다. 아니 내가 뱃속에 있었던 채로 엄마와 아빠가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엄마와 아빠의 결혼기념일을 몰랐으니 당연하다.
아홉 살 엄마는 죽고, 열 살에 새 엄마가 오셨다. 엄마의 사진이나 흔적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모든 엄마에 대한 기억은 삭제 된 채로 지금껏 살았다. 마흔 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