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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 May 14. 2019

하루키의 작고 산뜻한 세계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읽고 쓰다  

먼저 고백해두려 한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한다. 고등학생 시절 <해변의 카프카>라는 책으로 하루키와 처음 만나게 되었고, 그 뒤로 신간이 나올 때마다 나름 열심히 챙겨보고 있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하루키를 좋아하는가? 사실 지금까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왜?’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하면 정말 반가워하거나 (나도 하루키 좋아해) 혹은 나를 있어 보이고 싶어 책을 읽는 척하는 사람(요즘은 너도나도 하루키 하루키 쯧쯧)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첫 책인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 사람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1.

내가 가장 싫어하는 글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문장이나 장면을 낭비하는 글들이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그곳으로 달려가는 과정에 있는 문장이나 장면들이 성의 없이, 혹은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쓰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의미나 깨달음을 얻고자 책을 읽는 경우도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재미로 책을 읽는 편이라 모든 문장이나 장면에 읽는 맛이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하루키는 내 기준에서 소소한 장면들에서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는 작가다.


그렇다면 왜 하루키의 글들은 소소한 장면에서도 읽는 재미가 느껴지는 것일까? 아마 하루키가 가진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서도 이러한 점들이 느껴진다. 통신판매로 산 빨래건조대를 보고 느긋한 심정을 느끼고, 식료품 코너를 관찰하다가 통밀 호두빵에 크림치즈를 발라먹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 감흥 없이 흘려보낼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성향 때문인지 하루키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요리하고 음식을 먹는 부분은 매우 자연스럽고, 그들의 입는 옷이나 헤어스타일,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행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작지만 디테일한 부분들이 모여 읽는 재미가 있는 장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2.

하루키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끈끈하거나 질척이는 면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를 오가며 살아가는 그의 코스모폴리탄적 라이프스타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하루키의 글들은 굉장히 산뜻하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에서도 그러한 점이 느껴진다. 하루키 월드에서는 삶의 모든 힘듦도 우여곡절도 자국이 남지 않은 채 산뜻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들처럼 느껴진다.


하루키 월드의 남자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일단 매일 아침 강가를 따라 십 킬로미터를 달릴 것이다. 또한 배가 고플 때는 마늘을 두 알 굵직하게 잘라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로 볶은 다음 갓 삶은 스파게티면을 넣고 파슬리를 뿌려 파스타를 만들어 줄 것이다. 파스타를 맛있게 먹던 내가 갑자기 그에게 헤어지자고 하면 그는 산뜻한 얼굴로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겠지... 술 먹고 새벽에 전화를 하거나 집 앞에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대신 그는 치즈를 얇게 바른 오이 샌드위치를 먹다가 불현듯 하와이로 떠날지도... 어쨌든 그와 나는 산뜻하게 만나고 산뜻하게 헤어질 것이다.


사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현실성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이별은 질척일 것이고 다음날 회사에 가 엄한 사람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며 저녁에는 세상살이의 힘듦을 한탄하며 삼겹살에 소맥을 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삶 속에서 나는 하루키의 산뜻한 세계를 보며 위로를 얻고는 한다. 삶이 엉망진창 꼬여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 하루키의 작고 산뜻한 세계를 펼쳐본다. 하루키는 여전히 보스턴의 찰스 강변을 달리며 보스턴 마라톤을 대비하고, 재즈바를 찾아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동네 고양이들을 관찰한다. 책을 읽으며 나도 하루키를 따라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거나 하는 산뜻한 일들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산뜻한 일들이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고 느낀다. 결국 하루키의 산뜻한 세계를 보고 싶기 때문에 하루키의 신간을 계속해서 구매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3.

사실 말하다 보면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를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너무 맹목적인 팬처럼 보이는 것은 곤란할 것 같아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또한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은 하루키의 에세이 중에서 다소 별로인 편에 속했다. 작가의 말처럼 조금 편하게 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18.09.02)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by 무라카미하루키, 문학사상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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