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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 May 14. 2019

"그런데 넌 왜 그런 사람만 좋아하는거야?"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쓰다

1.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서둘러 퇴근을 했다. 커피를 내려마시며 <노르웨이의 숲>을 읽기 시작했다. 소파에 기대앉았다가 바닥에 내려가 앉다가를 반복하며 읽다가 와타나베와 이토가 오이를 된장에 찍어먹는 부분에서 오이가 먹고 싶어 잠시 책 읽기를 멈췄다.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내 열심히 씻은 다음, 된장 대신 피넛 월남쌈 소스(집에 된장이 없길래)에 찍어 먹으며 계속 읽었다. 책을 덮고 설거지를 한 다음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면서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려 한다.


2.

“저 말이야, 와타나베”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너도 기즈키를 좋아했지?”

“물론”하고 나는 대답했다.

“레이코 언니는 어때?”

“그 사람도 좋아해. 아주 좋은 사람이야.”

“그런데 왜 넌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야?" (224p)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어딘가 삐뚤어진/결핍이 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그런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하스미는 나가사와의 뒤틀린 면과 마음속의 수렁을 알면서도 그들을 필사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며, 애타게 사랑한다. 책에는 정확하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와타나베 역시 미도리에게는 결핍이 가득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미도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와타나베는 주말에 우리 집에 놀러 와 옥상에서 키스도 하고 힘들 때 옆에 있어주기도 했지만 걸핏하면 우울해하다가 걸핏하면 말도 없이 사라지고, 이유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은 채로 시간이 계속 필요하다고만 말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해서 세상에 너 말고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갑자기 감정을 쏟아버리는 어이없는 남자인 것이다. 미도리가 몇 개월간 와타나베와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핍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은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이야기(296p)처럼 다 같이 엉망이 되고 혼란에 빠진다. 기즈키의 혼란이 나오코의 혼란이 되고, 그 혼란이 와타나베에게도 옮아가 미도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결핍이 있는 사람을 이해하려던 사람들은 함께 결핍의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레이코나 와타나베처럼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게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엄청난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

 대체 왜 그들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왜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상처 받는 것일까? 이해하려 하지 않고 지나쳤으면 좋았을 텐데.


3.

 하지만 누구나 어딘가 삐뚤어진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 노력하고 좌절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해하고 싶지만 이해되지 않아 시간을 낭비하며 괴로움을 겪고, 그 괴로움을 이해받지 못해서 결국은 엄청나게 외로워지는 그러한 경험 말이다. 꼭 사랑으로 귀결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그런 일이 자주 생기기 마련인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몇 번 정도 있다(개인적인 이야기라 쓸까 말까 망설였지만 맥주를 마신 김에 써보려 한다).

지금도 대학시절 친구들과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면 등장하는 P라는 인물이 있는데, 친구들은 항상 ‘네가 정말 정말 좋아했던 P 있잖아...’ 라며 그에 대한 회상을 시작하고는 한다. 그러니까 P라는 인물은 내가 이십 대 초반에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민폐를 끼쳐가며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이래저래 호감을 가지고 있던 P에게 아무도 몰랐던 엄청난 결핍이 있고, 그것이 그가 삐뚤어진 인간으로 성장한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 나는 P를 이해하기 위해 버둥거렸다. 와타나베 55%에 미도리를 45% 정도 섞은 태도로 P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실패한 나는 P에게 편지를 써 관계를 끝내버리고 말았다.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수업시간에 아는 척하지 말라는 편지를 썼던 것처럼 말이다.


4.

강렬함의 정도는 다르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다른 사람의 삐뚤어짐을 이해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혹은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는 것에 실패하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숲>을 처음 읽었을 때 보다 이번이 훨씬 더 슬프게 느껴졌는데, 첫 독서 이후 만난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관계에서 이루어졌던 이해의 시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하루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이상하게도 지나치지 못하고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슬프고 외로워지는 경험을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상하게도 이러한 이야기를 읽으면 함께 슬퍼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2019.01.07)

* 페이지는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 기준


<노르웨이의 숲> by 무라카미하루키, 민음사(2017)
<상실의 시대> by 무라카미하루키, 문학사상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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